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플리에'...여기에 발레의 모든 게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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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
“10월은 봄이 시작되는 첫 달, 땅속 깊은 곳에서 싹이 트고 생장하는 달, 남몰래 싹눈이 여무는 달이다. 땅을 살살 파보면 엄지손가락만큼 두툼한 싹눈과 가녀린 새싹, 알알이 여물어가는 구근을 발견하게 된다. ‘봄이 여기 숨어 있네’라는 생각을 안 하고는 못 배긴다.”
이 칼럼의 모티브가 된 카렐 차페크(Karel Capek, 1890~1938)의 저서 <정원가의 열두 달> 중에서 10월 편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는 보통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10월은 씨앗을 뿌리기보다는 무언가를 거둬들이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정원가로 살았던 카레 차페크에게 10월은 다음 해에 땅 밖으로 고개를 내밀 식물들이 땅속 깊은 곳에서 움트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다음 해 정원에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 시작점인 것이다.
발레에서 ‘봄이 숨어있는’ 동작은 ‘플리에(plié)’라고 볼 수 있다. 플리에는 프랑스어로 ‘구부리다’, ‘접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말 그대로 무릎을 구부려서 내려갔다 올라가는 동작이다. 언뜻 듣기에는 아주 초보적인 동작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발레를 배울 때 제일 처음 접하게 되고, 발레 클래스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수행하는 동작이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플리에 동작이 어렵다거나 혹은 중요하다고 인식하지 않지만 발레를 배우면 배울수록 전혀 다른 점을 깨닫게 된다. 플리에를 가장 처음 배우는 건 쉬운 동작이여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동작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발레는 다른 춤과 달리 호흡을 위로 쓰고, 중력과 반대방향으로, 하늘로 향해 솟아오르는 춤이다. 인간의 날고 싶은 욕망이 '과학 머리'가 발달된 사람들을 통해서는 비행기의 발명으로 이어졌다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이카루스의 신화를 탄생시켰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발레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플리에는 하늘로 솟는 게 아니라 반대로 땅으로 내려가는 동작이다. 그런데도 플리에를 ‘남몰래 싹눈이 여무는 달’ 10월에 비유하고 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동작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플리에는 단순히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동작이 아니다. 우선 발과 무릎, 허벅지와 고관절이 바깥으로 향하는 턴아웃 자세로 하는 건 기본이다. 등은 펴고, 어깨는 내리고, 갈비뼈를 닫아서 배의 코어근육을 단단히 잡고, 꼬리뼈는 아래로 향해서 엉덩이가 뒤로 빠지지 않도록 된 상태로 무릎을 구부려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몸을 세워야 한다. 이 동작을 통해 허벅지 안쪽 근육이 탄탄하게 만들어지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즉, 이 동작 하나에 이미 호흡, 근육, 자세 등 발레의 다른 동작들을 잘 구사하고 익히기 위한 기본이 모두 농축돼 있는 것이다. (#사진01> 플리에 동작을 하고 있는 발레 무용수들 @National Ballet of Canada)
플리에는 아래로 향하는 모습이라 발레가 추구하는 천상을 향한 동작과는 정반대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땅으로 꺼지는 게 아니라 하늘로 향하기 위한 에너지가 응축되고, 위로 올라가기 위한 용수철이 되는 동작이다. 하늘로 향해 풀쩍 뛰어오르는 발레의 동작들을 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반드시 깊게 플리에 하는 동작이 먼저 수반된다. 깊은 플리에가 가장 높은 높이로 몸을 솟구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플리에는 발레의 다른 동작들을 원활하게 구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작이지만 고전발레 작품에서는 메인 동작은 아니었다. 고전발레의 정형미는 허리와 무릎이 펴지고 발끝의 둥근 아치까지 깔끔하게 몸의 선이 이어지는 데에서 나온다. 이 발레의 문법은 20세기 모던발레 시대에 들어서면서 깨지게 된다. 플리에 동작이 다른 동작을 구사하기 위한 도움닫기가 아니라 공연의 메인 동작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허리도 중심선에서 벗어나거나 구부릴 수 있고, 무릎과 발 또한 그럴 수 있다.
정형화된 문법을 깬 모습은 의외의 미를 가져왔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모던발레 작품이자, 많은 안무가들을 설레게 했던 이르지 킬리안(Jiří Kylián, 1947~) 안무작 <프티트 모르Petite Mort>(1991)만 봐도 그렇다. ‘프티트 모르’는 프랑스어로 ‘작은 죽음’으로 번역되지만 ‘오르가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작품 전체적으로 은밀한 성적 뉘앙스를 풍긴다.
이 작품에서 허리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옆으로 이동하거나 꺾는 오프밸런스 모습을 보이고, 무릎을 구부리는 플리에 동작들을 통해 인간의 신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진기한 구조적 아름다움을 끌어냈다. 고전발레에서는 모든 몸과 춤의 선이 수려하게 하나로 이어지는 선을 추구했다면, 모던발레에서는 그 선을 끊어내고 다른 것으로 이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춤의 조형미를 만들어낸 것이다. 플리에는 탄탄한 기본을 만드는 동작이지만 동시에 모던발레의 조형미를 완성하는 주요 동작으로 쓰이게 됐다. (#사진02, 03> 이르지 킬리안 <프티트 모르> 중에서 @English National Ballet)
발레를 처음 배울 때는 플리에가 간단한 동작인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제일 어려운 동작으로 다가온다. 기본을 지키는 건 어렵지만 그것을 지켜내면서 세월이 쌓여갈 때 후에 놀랄만한 무엇을 만나게 된다. 카렐 차페크가 10월을 봄이 시작되는 첫 달로 생각하는 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정원이 만들어지고 미래가 만들어진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10월의 정원이 이미 봄을 품고 있기 때문에 다음 해에 우리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다. 발레를 시작하는 첫 동작이자 완성하는 동작, 플리에는 10월의 정원을 닮았다.
이 칼럼의 모티브가 된 카렐 차페크(Karel Capek, 1890~1938)의 저서 <정원가의 열두 달> 중에서 10월 편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는 보통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10월은 씨앗을 뿌리기보다는 무언가를 거둬들이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정원가로 살았던 카레 차페크에게 10월은 다음 해에 땅 밖으로 고개를 내밀 식물들이 땅속 깊은 곳에서 움트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다음 해 정원에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 시작점인 것이다.
발레에서 ‘봄이 숨어있는’ 동작은 ‘플리에(plié)’라고 볼 수 있다. 플리에는 프랑스어로 ‘구부리다’, ‘접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말 그대로 무릎을 구부려서 내려갔다 올라가는 동작이다. 언뜻 듣기에는 아주 초보적인 동작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발레를 배울 때 제일 처음 접하게 되고, 발레 클래스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수행하는 동작이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플리에 동작이 어렵다거나 혹은 중요하다고 인식하지 않지만 발레를 배우면 배울수록 전혀 다른 점을 깨닫게 된다. 플리에를 가장 처음 배우는 건 쉬운 동작이여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동작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발레는 다른 춤과 달리 호흡을 위로 쓰고, 중력과 반대방향으로, 하늘로 향해 솟아오르는 춤이다. 인간의 날고 싶은 욕망이 '과학 머리'가 발달된 사람들을 통해서는 비행기의 발명으로 이어졌다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이카루스의 신화를 탄생시켰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발레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플리에는 하늘로 솟는 게 아니라 반대로 땅으로 내려가는 동작이다. 그런데도 플리에를 ‘남몰래 싹눈이 여무는 달’ 10월에 비유하고 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동작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플리에는 단순히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동작이 아니다. 우선 발과 무릎, 허벅지와 고관절이 바깥으로 향하는 턴아웃 자세로 하는 건 기본이다. 등은 펴고, 어깨는 내리고, 갈비뼈를 닫아서 배의 코어근육을 단단히 잡고, 꼬리뼈는 아래로 향해서 엉덩이가 뒤로 빠지지 않도록 된 상태로 무릎을 구부려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몸을 세워야 한다. 이 동작을 통해 허벅지 안쪽 근육이 탄탄하게 만들어지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즉, 이 동작 하나에 이미 호흡, 근육, 자세 등 발레의 다른 동작들을 잘 구사하고 익히기 위한 기본이 모두 농축돼 있는 것이다. (#사진01> 플리에 동작을 하고 있는 발레 무용수들 @National Ballet of Canada)
플리에는 아래로 향하는 모습이라 발레가 추구하는 천상을 향한 동작과는 정반대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땅으로 꺼지는 게 아니라 하늘로 향하기 위한 에너지가 응축되고, 위로 올라가기 위한 용수철이 되는 동작이다. 하늘로 향해 풀쩍 뛰어오르는 발레의 동작들을 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반드시 깊게 플리에 하는 동작이 먼저 수반된다. 깊은 플리에가 가장 높은 높이로 몸을 솟구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플리에는 발레의 다른 동작들을 원활하게 구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작이지만 고전발레 작품에서는 메인 동작은 아니었다. 고전발레의 정형미는 허리와 무릎이 펴지고 발끝의 둥근 아치까지 깔끔하게 몸의 선이 이어지는 데에서 나온다. 이 발레의 문법은 20세기 모던발레 시대에 들어서면서 깨지게 된다. 플리에 동작이 다른 동작을 구사하기 위한 도움닫기가 아니라 공연의 메인 동작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허리도 중심선에서 벗어나거나 구부릴 수 있고, 무릎과 발 또한 그럴 수 있다.
정형화된 문법을 깬 모습은 의외의 미를 가져왔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모던발레 작품이자, 많은 안무가들을 설레게 했던 이르지 킬리안(Jiří Kylián, 1947~) 안무작 <프티트 모르Petite Mort>(1991)만 봐도 그렇다. ‘프티트 모르’는 프랑스어로 ‘작은 죽음’으로 번역되지만 ‘오르가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작품 전체적으로 은밀한 성적 뉘앙스를 풍긴다.
이 작품에서 허리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옆으로 이동하거나 꺾는 오프밸런스 모습을 보이고, 무릎을 구부리는 플리에 동작들을 통해 인간의 신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진기한 구조적 아름다움을 끌어냈다. 고전발레에서는 모든 몸과 춤의 선이 수려하게 하나로 이어지는 선을 추구했다면, 모던발레에서는 그 선을 끊어내고 다른 것으로 이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춤의 조형미를 만들어낸 것이다. 플리에는 탄탄한 기본을 만드는 동작이지만 동시에 모던발레의 조형미를 완성하는 주요 동작으로 쓰이게 됐다. (#사진02, 03> 이르지 킬리안 <프티트 모르> 중에서 @English National Ballet)
발레를 처음 배울 때는 플리에가 간단한 동작인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제일 어려운 동작으로 다가온다. 기본을 지키는 건 어렵지만 그것을 지켜내면서 세월이 쌓여갈 때 후에 놀랄만한 무엇을 만나게 된다. 카렐 차페크가 10월을 봄이 시작되는 첫 달로 생각하는 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정원이 만들어지고 미래가 만들어진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10월의 정원이 이미 봄을 품고 있기 때문에 다음 해에 우리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다. 발레를 시작하는 첫 동작이자 완성하는 동작, 플리에는 10월의 정원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