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 시인과 작곡가가 쓴 지고지순한 여인 이야기...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
뜨거웠던 더위가 가시고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에 한기가 느껴진다. 계절의 변화를 코끝으로 느끼자 곧 있을 예술의 전당 개관 30주년 기념 리사이틀이 성큼 다가왔음이 실감난다.

피아니스트 안종도와 함께 하는 이번 리사이틀은 모차르트로 시작해 슈만, 말러, 베르크 그리고 코른골트까지 독일 가곡의 고전부터 낭만, 후기 낭만까지 시대순으로 신중하게 프로그램을 짰다. ‘여자의 사랑‘이라는 부제를 갖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았는데 그 중 이번 칼럼에서는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에 대해 소개를 하고자 한다.

그를 본 이후로
난 마치 눈이 먼 것 같아.
내가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오직 그 사람만 보이네.
깨어있는 꿈처럼
그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저 깊은 어둠 속에서
밝은 빛으로 떠오르네.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의 첫 구절이다.

여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한참 어릴 것 같은 어린 소녀의 감수성이 살아 있는 이 연가곡은 샤미소의 시에 슈만이 곡을 붙힌 곡으로 아버지의 허락 없이도 클라라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난 후 이틀 만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오직 남편만을 숭배하며 오직 그를 위해 살겠다는 지고지순한 여인의 모습을 남자 시인 샤미소가 그리고 슈만이 작곡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그들은 가부장적인 남편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자신같이 미천한 여인을 그렇게 위대하고 멋진 남자가 사랑할 리 없다며 그저 기도로 그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믿을 수 없다며 기쁨의 눈물 속에서 행복한 죽음을 음미하겠다는 내용의 1번부터 3번까지의 시. 그걸 읽고 있노라면, 하루에도 열 두번 이상 바뀌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어지는 4번 곡 “그대 내 손에 끼인 반지여”에서는 프로포즈 링을 가슴에 품고 평생 그를 위해 살며 그의 영광 안에서 빛나는 자신을 찾겠다고 경건하게 다짐하는 노래로 이전 세 곡과는 확연히 다른 차분함과 성숙함을 느끼게 한다. 결혼식 장면을 그리고 있는 5번 곡에서는 분주한 결혼식장의 모습과 들뜬 화자의 심리가 빠른 템포와 함께 잘 그려져 있고 특히 버진 로드를 걸으며 친구들의 축하 속에 눈물을 감추는 모습과 후주로 이어지는 결혼 행진곡은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는 기쁨과 또 다른 사랑하는 이들과의 헤어짐으로 슬픈 마음이 공존하는 순간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복한 결혼 생활, 사랑하는 이와 미래를 꿈꾸며 그를 닮은 아이를 안고 기뻐하며 이런 기쁨은 오직 여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남자들은 안타깝다고 말한다.

마지막 8번 곡 “이제야 당신은 내게 처음으로 고통을 주시네요”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피아노의 첫 음이 죽음을 알리고 잠자는 듯 딱딱하게 굳어버린 남편을 마주하며 자신의 세상이 사라졌음을 레치타티보와 같이 읊조리듯 노래한다. 그리고 다시 1번 곡 “그대를 본 이후로 난 눈이 먼 것 같아요” 의 선율이 사랑하는 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후주로 연주되며 여인의 모노드라마가 끝을 맺는다.

샤미소의 시에는 8번에 이어 할머니가 된 여인이 손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가 있다고 하나 슈만은 그 시에는 작곡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의 권위가 높아지고 오늘날 사회적 이슈가 되고있는 비혼주의, 딩크족, 저출산 등의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나 슈만의 음악적 드라마가 있어 이해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연가곡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순종은 시대를 막론하고 기꺼이 그리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男 시인과 작곡가가 쓴 지고지순한 여인 이야기...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