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이 쓰던 것들인데 돈은 안 될 같고, 자랑은 좀 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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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타이밍...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가의 방〉 이야기
[arte] 이보름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유물들
[arte] 이보름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유물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2층 서화관에 가면, 큰 윈도우 갤러리가 하나 있다. 유리 석장을 이어 붙인 큰 창의 오른쪽 아래에 〈서화가의 방〉이라고 제목을 달고 이당 김은호의 유품을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간략한 설명이 적혀있다. 사실 근데 이 공간 구성의 방점은 이당 김은호가 아니고, 1900년대 초중반, 전통 화법을 구사하던 화가가 어떤 공간에서 작업을 했는지 관람객들에게 알려주는, 그 시대의 분위기에 찍혀 있다. 아마 그래서 〈서화가의 방〉이라는 테마의 이름도,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설명도 간략하게, 관람에 거스르지 않게 자리해 둔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공간을 여러분께서 관람할 수 있게 된 것에 내 지분이 30%쯤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치는 사람마다 달리 볼지 몰라도, 나의 기여가 있었음은,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다 인정할 거라 믿는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이 물건들이 하필이면 이당의 초본들을 좋은 값에 잘 팔고 싶었던 경매 담당자의 눈에, 그리고 1900년대 초반의 생활상에 심취해있던 그 때의 내 눈에 발견되었기에 여기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윈도우 갤러리를 자세히 보시길 추천한다. 별의 별 것이 다 있다. 일단 그림이라고 할 것은 관람자의 시선 기준으로 왼쪽 벽에 기대어져 있는 것들인데, 모두 지난 칼럼에서 말한 세조어진 초본과 함께 들여온 것들이다. 이당이 즐겨 그리던 주제인 방야독서도나 꿩그림, 모란도, 산수도 밑그림들이다. 이당 김은호는 생전에 워낙 인기작가였다. 특히 부귀영화의 길상적 의미가 담긴 모란 그림이나 북송의 문인 구양수의 유명 시 〈추성부秋聲賦〉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방야독서도房夜讀書圖〉는 꽤 인기있는 주제여서 주문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그림들이 여럿 남아있는데, 초본을 모르고 볼 때는 ‘어떻게 저렇게 조금만 다르게,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비슷하게 잘 그렸지?’ 싶었는데 다 비책이 있었다. 아마 미술 전공자들은 다 아는 얘기겠지만, 실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신기할 따름이다. 공간 중앙에는 흔히 화류목이라고 하는, 굉장히 단단하고 무거운 중국 나무(자단목, Huanghuali)로 만들어진 서탁 한 쌍이 있고, 그 왼쪽에 역시 화류목으로 만든 필가, 쉽게 말해 붓걸이가 놓여있다. 그리고 좌우 양 끝에는 1900년대 초중반쯤, 아마도 일본에서 수입해 왔을 화구함, 그리고 연식이 꽤 된, 전통 약장을 연상시키는 과도기적 형태의 나무 서랍장이 놓여있다.
서탁을 비롯해 각종 가구 위에 놓여진 작은 기물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사기로 된 물감 그릇이나 돋보기, 문진 같은 것들은 대부분 화구함이나 서랍장 속에 들어있던 것들이다. 대부분은 내가 김은호의 초본들을 입수할 때 같이 가져온 것들이고, 그 외에 부족한 것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존 소장품들 중에서 적절히 골라 꾸민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데 모여 번듯한 공간을 잘 차지하고 있으니 참 잘된 일이다. 가지고 올 때는 사실 꼭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어떤 기관에서든 한 곳은 관심을 갖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경매에 낼 목적으로 가져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꼭 팔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단지 경매 출품작들을 높은 금액에 낙찰시키는 부스터 역할에 대한 기대만 있었다. 이런 20세기 전반기의 물건들이라는 것이 어쨌든 낡긴 낡아서 손은 손대로 많이 가는 데다가, 개별로는 연대가 짧다는 이유로, 과도기적 형태라는 이유로 전혀 값이 안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물건들을 입수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그림들을 챙기다 보니, 이당이 생전에 수집했던 다른 작가의 그림들도 나왔다. 그 당시 서화가라면 고동서화 완물은 당연한 취미생활일 터. 그래서 도자기나 목기 같은 공예품들이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다 화려한 화류목 가구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 앞 덮개를 들어 올려 상판 밑으로 밀어 넣으면 서랍이 너댓개 차있는 각게수리 형태의 화구함이 보였다.
또 주위에 무언가 잔뜩 쌓인 짐들을 치워보니 모양은 약장 같은데 옛날 학교 과학실 교구장에 달려있을 법한 손잡이가 많이 달린 서랍장이 있었다. 아래부터 큰 서랍을 몇 개 열어보았는데, 맨 밑 칸엔 게와 조개가 새겨진 크고 둥근 벼루가, 그 위 서랍들엔 물감을 개어서 사용했던 사기그릇들과 분채나 석채를 가는데 썼을 막자와 사발, 돋보기, 그리고 유리로 된 둥근 문진, 필가, 명패 등이 들어 있었다.
이당이 직접 쓰던 것이니 너무나 관심 가는 것들인데, 돈은 안될 것 같고, 근데 자랑은 하고 싶고, 그래서 가격을 매기지 않기로 하고 이것들을 일부 공개하는 것 까지만 서로 합의를 하고 가져왔다. 그래서 마침, 경매 프리뷰 전시장 입구에 마련되어있던 유리장 공간에 간단히 연출을 하고 분위기를 살렸다. 아무래도 경매 프리뷰는 정식 ‘전시회’처럼 공간 구성을 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랬던 물건들이 저 근사한 공간에 잘 전시된 것을 보니, 경매 출품작을 보조하기 위해 일부 꺼내놓았던 물건들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애써 살뜰히 수집해간 국립중앙박물관 선생님들의 눈도 여간 매서운 것이 아니구나 싶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그날 내가 어차피 돈이 안될 것들이니 수선 떨지 말고, 얌전하게 그냥 그림만 가져왔더라면 이것들은 언제 세상에 나왔을지 모를 일이다. 더 거슬러 가보자면, 내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1900년대 갑부집 결혼사에 오르내리던 화류장 혼수 세트 이야기를 몰랐더라면, 전쟁을 전후로 등장하는 동서양 혼종의 재미있는 옛날 가구 모양을 몰랐더라면, 화류목 서탁은 그냥 무거운 물건에 불과하고, 서랍장이나 화구함 같은 건 그냥 낡은 가구였을 뿐이었을 거다.
세상에 무언가가 나타날 때는 많은 사람의 공력이 들어가야만 하는 건 스마트폰, 초전도체 같은 새로운 물건이 되었든, 시간에, 먼지에 가려져있던 옛 물건이든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국립중앙박물관엔 연일 사람이 많다. 방문객 수로는 아시아에서 최고고, 세계에서는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면 그건 특별 기획전시의 효과인 것 같다.
상설전시실의 서화관은 늘 차분하다. 사람 많은 특별기획전에서 시달린 다음에, 잠시 휴식을 취하러 상설전시실을 들러보시길 바란다. 유물을 위한 쾌적한 공간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으며 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는 시간 속에서 또 내면의 나와, 어떤 대상의 타이밍이 맞으면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을 동력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윈도우 갤러리를 자세히 보시길 추천한다. 별의 별 것이 다 있다. 일단 그림이라고 할 것은 관람자의 시선 기준으로 왼쪽 벽에 기대어져 있는 것들인데, 모두 지난 칼럼에서 말한 세조어진 초본과 함께 들여온 것들이다. 이당이 즐겨 그리던 주제인 방야독서도나 꿩그림, 모란도, 산수도 밑그림들이다. 이당 김은호는 생전에 워낙 인기작가였다. 특히 부귀영화의 길상적 의미가 담긴 모란 그림이나 북송의 문인 구양수의 유명 시 〈추성부秋聲賦〉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방야독서도房夜讀書圖〉는 꽤 인기있는 주제여서 주문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그림들이 여럿 남아있는데, 초본을 모르고 볼 때는 ‘어떻게 저렇게 조금만 다르게,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비슷하게 잘 그렸지?’ 싶었는데 다 비책이 있었다. 아마 미술 전공자들은 다 아는 얘기겠지만, 실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신기할 따름이다. 공간 중앙에는 흔히 화류목이라고 하는, 굉장히 단단하고 무거운 중국 나무(자단목, Huanghuali)로 만들어진 서탁 한 쌍이 있고, 그 왼쪽에 역시 화류목으로 만든 필가, 쉽게 말해 붓걸이가 놓여있다. 그리고 좌우 양 끝에는 1900년대 초중반쯤, 아마도 일본에서 수입해 왔을 화구함, 그리고 연식이 꽤 된, 전통 약장을 연상시키는 과도기적 형태의 나무 서랍장이 놓여있다.
서탁을 비롯해 각종 가구 위에 놓여진 작은 기물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사기로 된 물감 그릇이나 돋보기, 문진 같은 것들은 대부분 화구함이나 서랍장 속에 들어있던 것들이다. 대부분은 내가 김은호의 초본들을 입수할 때 같이 가져온 것들이고, 그 외에 부족한 것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존 소장품들 중에서 적절히 골라 꾸민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데 모여 번듯한 공간을 잘 차지하고 있으니 참 잘된 일이다. 가지고 올 때는 사실 꼭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어떤 기관에서든 한 곳은 관심을 갖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경매에 낼 목적으로 가져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꼭 팔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단지 경매 출품작들을 높은 금액에 낙찰시키는 부스터 역할에 대한 기대만 있었다. 이런 20세기 전반기의 물건들이라는 것이 어쨌든 낡긴 낡아서 손은 손대로 많이 가는 데다가, 개별로는 연대가 짧다는 이유로, 과도기적 형태라는 이유로 전혀 값이 안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물건들을 입수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그림들을 챙기다 보니, 이당이 생전에 수집했던 다른 작가의 그림들도 나왔다. 그 당시 서화가라면 고동서화 완물은 당연한 취미생활일 터. 그래서 도자기나 목기 같은 공예품들이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다 화려한 화류목 가구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 앞 덮개를 들어 올려 상판 밑으로 밀어 넣으면 서랍이 너댓개 차있는 각게수리 형태의 화구함이 보였다.
또 주위에 무언가 잔뜩 쌓인 짐들을 치워보니 모양은 약장 같은데 옛날 학교 과학실 교구장에 달려있을 법한 손잡이가 많이 달린 서랍장이 있었다. 아래부터 큰 서랍을 몇 개 열어보았는데, 맨 밑 칸엔 게와 조개가 새겨진 크고 둥근 벼루가, 그 위 서랍들엔 물감을 개어서 사용했던 사기그릇들과 분채나 석채를 가는데 썼을 막자와 사발, 돋보기, 그리고 유리로 된 둥근 문진, 필가, 명패 등이 들어 있었다.
이당이 직접 쓰던 것이니 너무나 관심 가는 것들인데, 돈은 안될 것 같고, 근데 자랑은 하고 싶고, 그래서 가격을 매기지 않기로 하고 이것들을 일부 공개하는 것 까지만 서로 합의를 하고 가져왔다. 그래서 마침, 경매 프리뷰 전시장 입구에 마련되어있던 유리장 공간에 간단히 연출을 하고 분위기를 살렸다. 아무래도 경매 프리뷰는 정식 ‘전시회’처럼 공간 구성을 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랬던 물건들이 저 근사한 공간에 잘 전시된 것을 보니, 경매 출품작을 보조하기 위해 일부 꺼내놓았던 물건들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애써 살뜰히 수집해간 국립중앙박물관 선생님들의 눈도 여간 매서운 것이 아니구나 싶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그날 내가 어차피 돈이 안될 것들이니 수선 떨지 말고, 얌전하게 그냥 그림만 가져왔더라면 이것들은 언제 세상에 나왔을지 모를 일이다. 더 거슬러 가보자면, 내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1900년대 갑부집 결혼사에 오르내리던 화류장 혼수 세트 이야기를 몰랐더라면, 전쟁을 전후로 등장하는 동서양 혼종의 재미있는 옛날 가구 모양을 몰랐더라면, 화류목 서탁은 그냥 무거운 물건에 불과하고, 서랍장이나 화구함 같은 건 그냥 낡은 가구였을 뿐이었을 거다.
세상에 무언가가 나타날 때는 많은 사람의 공력이 들어가야만 하는 건 스마트폰, 초전도체 같은 새로운 물건이 되었든, 시간에, 먼지에 가려져있던 옛 물건이든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국립중앙박물관엔 연일 사람이 많다. 방문객 수로는 아시아에서 최고고, 세계에서는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면 그건 특별 기획전시의 효과인 것 같다.
상설전시실의 서화관은 늘 차분하다. 사람 많은 특별기획전에서 시달린 다음에, 잠시 휴식을 취하러 상설전시실을 들러보시길 바란다. 유물을 위한 쾌적한 공간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으며 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는 시간 속에서 또 내면의 나와, 어떤 대상의 타이밍이 맞으면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을 동력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