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켜는 내 손목에 심장 입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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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의 ‘로드 오브 뮤직’
글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미지적 인상보다는 텍스트와 맥락에 대한 집중도가 더 높은 사람이다. 물론 아름다운 촬영기법이 눈에 띄는 영화, 사운드가 '잘 빠진' 노래, 스타일이 좋은 사람을 보면 매력을 느끼고 눈길을 보내게 되기 마련이지만, 결국 마음에 깊게 남아 나를 변화시키는 작품들은 통찰력 있는 대화가 인상적인 영화, 전개가 환상적인 음악,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모두 충분히 이해하고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이제는 번지르르하게 멋진 무언가를 보면 매혹적이라는 느낌보다 속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드는데, 이것은 아마 내가 나의 취향, 나의 성향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어 예전보다 시간을 덜 낭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즉각적으로 멋져 보이는 것들은 대체로 그렇다. 결국엔 실망하게 될 대상이랄까.
그래서인지 힙하고 쿨한, 가장 최근에 나온 음악의 그루브를 즐기며 생활하다가도 내가 나로 돌아와야 하는 순간이 오면 찾게되는 음악들이 있다. 가장 진실된 모습의 나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음악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와 함께 할 그야말로 내 인생의 ‘고전'이 된 음악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슈만이 그렇고, 슈베르트가 그렇다. 그리고 만약 클래식이 아닌 음악 중 이런 의미를 가진 음악을 골라야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데미안 라이스의 앨범, ‘O’ 그리고 ‘9’ 일 것이다. 고독한 순간이 찾아올 때, 혹은 내가 고독을 찾아가고 싶을 때 이 두개의 앨범은 어떤 음악보다 더욱 더 확실하게 나 혼자만 오롯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듣는 이를 이끈다.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은 대부분 현악기의 소리를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사운드스케이프 자체는 상당히 서정적이고 시적이다.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콜라보한 리사 해니건의 목소리는 공명이 가득하고 촉촉하게 젖어있는 듯 감성적이다. 그의 목소리는 흔히 말하는 ‘노래를 잘한다'는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그저 ‘데미안 라이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때로는 부서질 듯, 때로는 거칠게 섬세한 감정을 토해낼 때면 그의 음악을 듣는 이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세계로 이끌려가게 된다.
또한 그의 언어는 날카롭게 날 서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은유적 시에 덧붙혀진 그의 음악을 언뜻 들었을 때는 낭만적이라고 느껴지지만, 그 낭만에는 언제나 희미하게나마 분노의 인상이 저며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가 그의 음악을 매 초, 매 순간 아프게 살아있게 한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보통 감정을 어떠한 필터를 거쳐서 표현한다. 한번만 걸러서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두번 세번을 거쳐 최대한 정제한 감정만을 나누며 그것을 ‘절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절제는 무사히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필요 덕목일 뿐 아니라 심지어 조금 더 높은 클래스의 사람으로 분류되기 위한 방법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다가, 절제를 강요하는 이러한 무언의 압박에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것 같은 아티스트, 그리고 음악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에게 완벽히 솔직해지게 된다. 그 솔직함에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고독의 시간만큼은 아무런 필터 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감각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어떤 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고백을 듣다보면, 나 또한 나의 가장 솔직한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 우정, 성취 같은 긍정적인 감정 뿐 아니라 질투, 욕망, 분노 같은 마주하기 힘든 감정까지도 말이다. 영어 표현 중 ‘심장을 손목에 입는다'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감정에 스스럼이 없이 숨기지 않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인데, 심장이 손목에 있으면 누구든지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짐작해 본다. 사실 요즘은 연주하는 손목에 심장을 옮겨올 수 있다면 끌어내려 손목에 입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만들어 내는 소리가 조금 더 직접적인 감정의 동요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떻게 하면 듣는 이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소리에 1㎜ 단위로 생명과 감정을 불어 넣을 수 있을까. 그것이 요즘의 화두이자 고민이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듣지 않았던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까지 접근 하지 못했던 수준의 솔직함으로 내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느껴보는 것에서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렇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전에, 내 소리가 내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그렇기도 하다. 그의 음악은 나를 왜인지 조금 부끄럽게 한다. 내가 인생의 순간 순간 완전히 슬퍼했던가, 완전히 행복을 느꼈던가, 완전히 두려워했던가, 완전히 사랑했던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듯 하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건지 언제나 조금은 방어하는 마음으로 감정을 대하는 나의 음악에 과연 나는 진실된 마음을 실을 수 있었던가. 이성적 판단의 기재로 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온전히 감각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 그것은 아마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첫 관문이자, 음악에 더욱 다양한 색채의 감정을 입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결국, 음악은 거짓없는 가장 진솔한 마음을 가지고 나누도록 우리를 이끄나 보다.
이제는 번지르르하게 멋진 무언가를 보면 매혹적이라는 느낌보다 속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드는데, 이것은 아마 내가 나의 취향, 나의 성향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어 예전보다 시간을 덜 낭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즉각적으로 멋져 보이는 것들은 대체로 그렇다. 결국엔 실망하게 될 대상이랄까.
그래서인지 힙하고 쿨한, 가장 최근에 나온 음악의 그루브를 즐기며 생활하다가도 내가 나로 돌아와야 하는 순간이 오면 찾게되는 음악들이 있다. 가장 진실된 모습의 나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음악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와 함께 할 그야말로 내 인생의 ‘고전'이 된 음악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슈만이 그렇고, 슈베르트가 그렇다. 그리고 만약 클래식이 아닌 음악 중 이런 의미를 가진 음악을 골라야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데미안 라이스의 앨범, ‘O’ 그리고 ‘9’ 일 것이다. 고독한 순간이 찾아올 때, 혹은 내가 고독을 찾아가고 싶을 때 이 두개의 앨범은 어떤 음악보다 더욱 더 확실하게 나 혼자만 오롯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듣는 이를 이끈다.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은 대부분 현악기의 소리를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사운드스케이프 자체는 상당히 서정적이고 시적이다.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콜라보한 리사 해니건의 목소리는 공명이 가득하고 촉촉하게 젖어있는 듯 감성적이다. 그의 목소리는 흔히 말하는 ‘노래를 잘한다'는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그저 ‘데미안 라이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때로는 부서질 듯, 때로는 거칠게 섬세한 감정을 토해낼 때면 그의 음악을 듣는 이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세계로 이끌려가게 된다.
또한 그의 언어는 날카롭게 날 서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은유적 시에 덧붙혀진 그의 음악을 언뜻 들었을 때는 낭만적이라고 느껴지지만, 그 낭만에는 언제나 희미하게나마 분노의 인상이 저며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가 그의 음악을 매 초, 매 순간 아프게 살아있게 한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보통 감정을 어떠한 필터를 거쳐서 표현한다. 한번만 걸러서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두번 세번을 거쳐 최대한 정제한 감정만을 나누며 그것을 ‘절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절제는 무사히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필요 덕목일 뿐 아니라 심지어 조금 더 높은 클래스의 사람으로 분류되기 위한 방법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다가, 절제를 강요하는 이러한 무언의 압박에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것 같은 아티스트, 그리고 음악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에게 완벽히 솔직해지게 된다. 그 솔직함에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고독의 시간만큼은 아무런 필터 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감각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어떤 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고백을 듣다보면, 나 또한 나의 가장 솔직한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 우정, 성취 같은 긍정적인 감정 뿐 아니라 질투, 욕망, 분노 같은 마주하기 힘든 감정까지도 말이다. 영어 표현 중 ‘심장을 손목에 입는다'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감정에 스스럼이 없이 숨기지 않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인데, 심장이 손목에 있으면 누구든지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짐작해 본다. 사실 요즘은 연주하는 손목에 심장을 옮겨올 수 있다면 끌어내려 손목에 입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만들어 내는 소리가 조금 더 직접적인 감정의 동요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떻게 하면 듣는 이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소리에 1㎜ 단위로 생명과 감정을 불어 넣을 수 있을까. 그것이 요즘의 화두이자 고민이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듣지 않았던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까지 접근 하지 못했던 수준의 솔직함으로 내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느껴보는 것에서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렇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전에, 내 소리가 내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그렇기도 하다. 그의 음악은 나를 왜인지 조금 부끄럽게 한다. 내가 인생의 순간 순간 완전히 슬퍼했던가, 완전히 행복을 느꼈던가, 완전히 두려워했던가, 완전히 사랑했던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듯 하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건지 언제나 조금은 방어하는 마음으로 감정을 대하는 나의 음악에 과연 나는 진실된 마음을 실을 수 있었던가. 이성적 판단의 기재로 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온전히 감각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 그것은 아마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첫 관문이자, 음악에 더욱 다양한 색채의 감정을 입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결국, 음악은 거짓없는 가장 진솔한 마음을 가지고 나누도록 우리를 이끄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