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미술관서 사후 첫 회고전

'1. 예술가는 작품을 고안할 수 있다.

2. 작품은 제작될 수 있다.

3.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각 항은 예술가의 의도와 동등하고 일치하며 조건에 대한 결정은 수용 당시 수용자에게 달려 있다.

'
미국 개념미술 작가 로런스 위너(1942∼2021)는 1969년 1월 '의도의 진술' 선언문에서 이같이 선언했다.

예술가는 무엇인가를 고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실제 작품을 제작할지 결정하는 것은 예술가가 아닌 '수용 당시 수용자'(관람자 혹은 작품 구입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와 관람자 관계 새롭게 정의한 로런스 위너의 '언어조각'
예술가와 수용자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 위너의 국내 첫 개인전이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2021년 12월 별세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위너는 언어를 하나의 물질로 보고 이를 재료로 조각적인 개념을 제시한 '언어 조각'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된 '언어 조각'들은 대부분 시트지를 이용해 'UNDER THE SUN'(태양 아래), 'TO SEE & BE SEEN'(보는 것과 보이는 것), 'CAREFULLY BALANCED ON THE EDGE OF A HOLE IN TIME'(시간 속 구멍의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균형 잡힌) 같은 짧은 영어 문구를 벽에 붙인 형태다.

대개 개념미술은 작가가 작품의 설치 방법 등에 대해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시하곤 하지만 위너는 영어 문구나 문장 같은 언어 그 자체를 제시했을 뿐 전시장 벽의 어느 위치에, 어떤 폰트를 사용해 붙일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전시의 작품 배치는 처음 전시 때 모습을 참고로 로런스 위너 재단과 미술관이 협의해 결정했다고 한다.

예술가와 관람자 관계 새롭게 정의한 로런스 위너의 '언어조각'
언어 그 자체인 위너의 작품은 어떻게 판매되고 소장할 수 있을까.

위너의 작품은 판매될 때 구입자에게 해당 작품의 구현 여부를 책임지도록 하는 '책임장'(letter of responsibility)을 함께 제공한다.

'의도의 진술' 선언문에서 실제 작품의 구현 여부를 수용자(구입자)가 결정하도록 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원래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작품은 여러 곳에서 전시할 수 없지만 언어 그 자체인 위너의 '언어 조각'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전시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소장자는 소장 작품을 다른 곳에 '대여'할 때 원래 있었던 시트지를 뜯어낼 수도, 잠시 가려놓을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있다.

문구에 대한 해석도 수용자, 즉 관람객의 자유다.

위너가 해당 문구나 문장을 제시했을 당시의 맥락은 있지만 전시가 이뤄지는 장소와 그곳의 문화, 역사 등에 따라 관람객은 얼마든지 다른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작품에 특정한 의미가 담기는 것을 거부한 작가의 철학을 존중해 구체적인 작품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예술가와 관람자 관계 새롭게 정의한 로런스 위너의 '언어조각'
전시는 다양한 국가와 문화적 요소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의 철학에 따라 일부 작품을 한국어로도 함께 설치해 보여준다.

전시장 중간중간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고미술 소장품을 배치한 것 역시 작가의 철학을 반영한 전시 기획이다.

전시는 언어 조각 47점을 비롯해 드로잉, 포스터, 모션 드로잉, 영상 등을 통해 작가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소개한다.

내년 1월28일까지. 유료 관람.
예술가와 관람자 관계 새롭게 정의한 로런스 위너의 '언어조각'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