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오디오는 레코드에 실린 화석 같은 음악도 생생하게 살려낸다

하이엔드 오디오 산업은 일종의 ‘무브먼트’, ‘현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음악 마니아와 오디오 마니아들의 상식을 파괴하며 성장했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윌슨 오디오부터 틸 등의 하이엔드 스피커는 광대역에 마치 실연을 연상시킬 만큼 커다란 음장을 재현했다.

한 편으론 리본, 정전형 스피커들이 새롭게 탄생하는 등 그야말로 천재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군웅할거하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이를 제대로 드라이빙하기 위한 앰프들도 출현했다. 마크 레빈슨부터 크렐 같은 대출력, 클래스 A 앰프들이 나타나면서 타협이 없는 극단적인 설계의 브랜드들이 춘추전국 시대를 이뤘다.

스피커 부문을 살펴보면 윌슨, 틸, 아발론, 이글스턴웍스 등이 생각난다. 윌슨은 Wamm을 위시로 와트/퍼피 시리즈 등 각 대역을 담당하는 드라이브 유닛을 위상 정렬 및 대역간 간섭을 피하기 위해 분리, 배열하면서 고유의 디자인, 설계를 도입했다. 틸은 동축 유닛을 핵심으로 전면 배플 디자인이 시그니처였고. 아발론 또한 가장 대표적인 음장형 스피커로 맹위를 떨쳤다. 이클스턴웍스는 Andra라는 초유의 하이엔드 스피커로 당시 윌슨과 대적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월은 유수와 같고 그 전설 같던 스피커 메이커의 수장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윌슨 오디오는 데이브 윌슨이 이끌면서 굳건해 보였지만 몇 년 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다행히 그의 죽음 이후 그와 함께 했던 데럴 윌슨이 메이커를 멋지게 이끌고 있다.

틸을 이끌었던 짐 틸 또한 세상을 떠난 지 오래고 이후 회사는 이렇다 할 신제품을 내놓지 못하다 2018년 문을 닫았다. 아발론의 설립자 찰스 한센은 에어 어쿠스틱스를 차려 나갔고 이후 아발론은 닐 파텔이 이끌고 있다. 마크 레빈슨의 눈에 들어 함께 첼로 스피커를 만들었던 윌리엄 이글스턴은 이글스턴웍스에서 Andra를 만든 이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시대는 새로운 천재를 원했다. 10만 달러가 현실적인 레퍼런스 스피커의 기준이었던 시절을 넘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이전 세대의 사운드를 넘어서는 스피커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다. 이런 와중에 물밑에 숨어 있던 실력자들이 슬슬 몸을 풀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92년 턴테이블 제작을 시작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앤디 페이어의 락로트가 있었다. 몇 년 후인 1994년엔 알론 울프라는 괴짜가 매지코를 시작하면서 알루미늄 인클로저와 고가의 드라이브 유닛을 사용해 이전에 없었던 스피커 설계를 도입했다.

그리고 2002년 이스라엘 육군 소속이었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요아브 게바라는 인물이 YG 어쿠스틱스라는 스피커 메이커를 설립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전에 없던 또 다른 새로운 무브먼트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

하이엔드 스피커의 새로운 물결은 이후 커다란 파도가 되어 시장을 잠식해버린다. 락포트, 매지코 그리고 YG 어쿠스틱스 등 신진 메이커의 약진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여전히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이커 윌슨오디오까지 합하면 윌슨오디오, 락포트, 매지코, YG 어쿠스틱스 등 미국 4개 브랜드를 이른바 ‘4대 천황’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 같다.

몇 달 전 호기롭게 세팅한 나의 시청실에 4대 천황 중 두 개 브랜드의 대표적인 스피커를 설치했다. 하나는 윌슨오디오의 알파와 오메가 같은 시리즈 와트/퍼피 후속 사샤 스피커다. 이 스피커는 이른바 황금귀 데이브 윌슨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명기 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롱런하면서 전 세계에 걸쳐 가장 많은 사용자층을 가진 스피커다.

그 중 와트/퍼피 8을 끝으로 새로운 시리즈 사샤 와트/퍼피로 개명하면서 처음 출시한 스피커가 바로 사샤로서 이후 다양한 후속기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예를 들어 사샤 2, 사샤 DAW 그리고 최근의 사샤 V가 그 주인공들이다.

또 하나는 4대 천황 중 두 번째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락포트 테크놀로지의 모델이다. 바로 Atria라는 모델. 락포트 또한 구력이 꽤 되는 만큼 다양한 모델을 출시했다. Mira, Mira Grand, Altair, Merak/Sheritan, Arrakis 등등. 구형도 좋지만 가장 큰 인상을 받았던 모델은 아무래도 베릴륨 트위터를 탑재하면서 세대교체를 선언한 Atria, Avior 등부터다. 이때부터 기존 락포트 사운드에서 드라마틱한 사운드 변화와 업그레이드가 있었다.

종종 필자는 이 두 개의 스피커를 나란히 놓고 동일한 음악을 비교해보곤 한다. 일반적인 음악 애호가는 오디오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음악을 바꾸어가면서 즐긴다면 필자는 종종 음악은 단 몇 곡으로 고정하고 스피커를 바꾸어가면서 음향적인 부분을 비교해본다. 이런 비교는 동일한 음악도 오디오 시스템에 따라서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재생하고 그것이 얼마나 다른 경향의 감흥을 만들어내는지 알게 해준다.

예를 들어 윌슨 사샤로 음악을 들으면 어떤 음악들도 호쾌하고 싱싱하게 재생한다. 미대륙에서 탄생한 스피커답게 호방한 무대를 그려주며 특히 쭉쭉 뻗어가는 고역에 묵직한 저역이 쾌감을 극대화한다. 이런 특성 덕분에 대편성 오케스트라 듣기엔 윌슨 사샤가 락포트 Atria 대비 강점이 많다. 반대로 음색 부분에 있어선 자신의 색깔이 부각되진 않는 편이다.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녹음을 들어보면 팔색조로 표현되는 바이올린이 굉장히 싱싱하지만 묘한 뉘앙스, 피어오르는 듯한 미묘한 온도감, 색조 표현은 그리 돋보이지 못한다.

한편 락포트 Atria는 커다란 공간에서 대편성 음악은 무대가 사샤에 비해 작아서 오밀조밀하게 재생된다. 물론 20평 정도의 시청 공간을 감안해서 그렇다. 하지만 윌슨오디오 사샤에서 표현되지 못했던 음색적인 개성이 돌출된다. 둘 다 트위터 성능이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높아 섬세하지만, 윌슨은 전체 대역 밸런스가 좀 더 평탄한 반면 락포트 Atria는 중역대가 살짝 도드라지면서 무게 중심도 훨씬 더 낮게 깔려 점잖은 소리를 내준다. 미국 스피커답지 않게 진한 중역대를 바탕으로 중, 고역대 미묘한 뉘앙스 표현, 온도감에 있어 이 스피커만의 질감 표현이 매력적이다.

음악 애호가에게 오디오 마니아는 정작 음악은 모르고 음향만 좇는, 어쩌면 헛된 욕망과 집착에 빠진 사람들로 인식되곤 한다. 반대로 오디오 마니아들은 음악 애호가들이 음악을 더 감명 깊게 들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일갈하곤 한다. 음악적 깊이를 더해가는 일을 게을리하고 음향에만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양쪽을 모두 균형 있게 즐기는 애호가도 많다.

필자는 후자의 길을 택했다. 레코드에 기록된 화석 같은 음악이지만 재생하는 오디오 시스템에 따라서는 마치 재해석된 음악처럼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며 그것이 더 깊은 음악 감상을 추동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음악의 다양한 모양을 발견해보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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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오디오는 레코드에 실린 '화석' 같은 음악도 생생하게 살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