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아파트' (1) [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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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16, 94살,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16, 94살,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오늘부터 ‘성문 밖 첫 동네’는 충정로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림동을 이야기하면서 중림동의 지역적 특색으로 단연 만초천을 거론했다. 만초천이 중림동으로 흘러 조선시대에 서소문 처형장의 입지가 용이했고, 이곳의 순교자들로 인해 중림동 약현성당이 들어섰다. 만초천의 흐름으로 염천교, 윤동주의 자화상 이야기도 소개했다. 그리고 충정로에는 ‘전차’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과는 다른 ‘전차’이다. 이 전차는 1907년 서대문에서 출발해 마포를 종착역으로 했다. 왕년의 인기 가수 은방울 자매의 노래인 ‘마포종점’은 충정로를 지나 아현 고개를 넘어 공덕, 마포까지 갔던 이 전차의 종점 이야기이다. 지금도 마포에 가면 당시 운행했던 전차를 볼 수 있다. 마포구간을 운행한 이 전차는 강화도에서 황포돛단배로 운반해 온 새우젓 항아리도 수없이 날랐을 것이다. 전차의 개통으로 충정로 일대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성문 밖 첫 동네, 한적한 시골 마을이 쇠바퀴의 굉음이 진동하는 첨단 문화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 1960년대에도 서울에는 초가집들이 있었고 변두리에는 논밭이 즐비했다. 필자도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대방동 논밭길을 어릴 적 누나 등에 업혀 다닌 기억이 있다. 하물며 백여 년 전에는 어땠을까? 논밭 사이로 만초천이 흐르고 그 옆에 미나리가 물결치는 동네(미근동)가 이곳 아니었던가? 천에서 조개를 잡는 조무래기들 사이로 순박한 농부는 소를 몰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동네에 전차의 굉음이 진동하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전차가 들어서니 역사(驛舍)가 생기고 역사가 들어서니 역세권이 되었다. 역세권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파트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풍전아파트가 들어섰다. 지금은 충정아파트라고 부른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아파트 이야기다.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맞은편의 허름한 녹색건물이 충정아파트이다. 이 아파트의 원래 이름은 도요타아파트. 한문으로는 풍전(豊田,도요타)이다. 설계자 도요타다네오(豊田種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서울, 아니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다. 1931년, 그런데 건축 대장에는 늦게 등재돼 1937년으로 돼있다. 그래서 이 아파트의 나이는 94세다. 이 아파트에 대한 기록은 1950년 6.25의 한 장면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맥스 데스포(Max Desfor)로 한국전쟁의 처참한 상황을 전 세계에 타전한 종군기자다. 한국전쟁을 말할 때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넘어 남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다. 국방부 자료에는 촬영 일자가 1950년 9월26일로 추정된다. 사진 속 뒷편 흐릿한 건물이 충정아파트다. 전쟁 당시 이 아파트는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고층건물이었다. 북한 점령시에 이곳에 인민군재판소가 있어 지하에서는 양민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1970년대에 충정로가 확장되면서 잘려나간 옆면이 그대로 보인다. 뒤에 장갑차가 서울 방향으로 가다가 배후의 맨홀에서 공격하는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아현동 방향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이다. 이 길이 확장되기 전의 충정로이다. 쫓기는 인민군이 지하벙커에 숨어있다. 이 벙커에 백린연막수류탄 공격으로 튀어나온, 머리를 박박 깍은 인민군 병사가 오른쪽에 누워있다. 아마도 미국 해병에 의해 사살되고 있는 듯하다. 착검을 한 미국 해병이 벙커를 경계하고 있다.
서울 탈환 이후 이 건물은 새로운 운명을 맞는다. 인민군재판소에서 미군부대로 바뀐 것이다. 전쟁은 사람의 운명만 바꾸는 게 아니라 건물의 운명도 바꿨다. 재크(JACK, 미군정보기관, 극동고문단사령부)부대 막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아파트에서 경비를 섰던 사람이 있다. ‘서울은 만원이다’를 쓴 소설가 이호철이다. 그는 원산 태생으로 원산 고등보통학교 학생 ‘광장’을 쓴 최인훈과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 그의 삶은 기구했다. 전쟁통에 고3 학생으로 인민군에 동원돼 따발총까지 지니고 있었다는데 인민군으로 남진하다 강원도 양양에서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런데 강원도 흡곡에서 구사일생으로 자형을 만났다. 허술한 시절이라 자형이 포로를 감시하는 헌병에게 말해 풀려나게 됐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갈 곳 없는 신세. 부산바닥에서 전전하다 이번에는 부산의 재크부대를 지키는 경비대에 취직했다.
그 인연으로 알고 있던 사람에게 취직을 부탁하러 온 것이다. 이 아파트가 인민군재판소에서 재크부대로 사용될 때의 이야기다. 그가 전차 운전기사에게 도요타아파트를 아느냐고 묻자, 운전사는 "저기 덩실하게 서 있는 집 보이지요? 저게 도요타아파트라는 거예요”하면서 당시의 모습을 기억한다. ‘지금은 치안본부 건물이며 그 밖에도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서있어 보일 턱이 없지만, 그때는 그냥 허허벌판 같은 황폐함 속에 4층짜리 그 건물이 제법 우람한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호철, <이호철의 문단일기> 110페이지, 프리미엄북스, 1997년)
그는 1년 사이에 따발총을 맨 인민군이었다가 미군부대 경비원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전쟁통에 우화 같은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충정아파트는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중림동을 이야기하면서 중림동의 지역적 특색으로 단연 만초천을 거론했다. 만초천이 중림동으로 흘러 조선시대에 서소문 처형장의 입지가 용이했고, 이곳의 순교자들로 인해 중림동 약현성당이 들어섰다. 만초천의 흐름으로 염천교, 윤동주의 자화상 이야기도 소개했다. 그리고 충정로에는 ‘전차’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과는 다른 ‘전차’이다. 이 전차는 1907년 서대문에서 출발해 마포를 종착역으로 했다. 왕년의 인기 가수 은방울 자매의 노래인 ‘마포종점’은 충정로를 지나 아현 고개를 넘어 공덕, 마포까지 갔던 이 전차의 종점 이야기이다. 지금도 마포에 가면 당시 운행했던 전차를 볼 수 있다. 마포구간을 운행한 이 전차는 강화도에서 황포돛단배로 운반해 온 새우젓 항아리도 수없이 날랐을 것이다. 전차의 개통으로 충정로 일대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성문 밖 첫 동네, 한적한 시골 마을이 쇠바퀴의 굉음이 진동하는 첨단 문화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 1960년대에도 서울에는 초가집들이 있었고 변두리에는 논밭이 즐비했다. 필자도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대방동 논밭길을 어릴 적 누나 등에 업혀 다닌 기억이 있다. 하물며 백여 년 전에는 어땠을까? 논밭 사이로 만초천이 흐르고 그 옆에 미나리가 물결치는 동네(미근동)가 이곳 아니었던가? 천에서 조개를 잡는 조무래기들 사이로 순박한 농부는 소를 몰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동네에 전차의 굉음이 진동하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전차가 들어서니 역사(驛舍)가 생기고 역사가 들어서니 역세권이 되었다. 역세권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파트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풍전아파트가 들어섰다. 지금은 충정아파트라고 부른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아파트 이야기다.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맞은편의 허름한 녹색건물이 충정아파트이다. 이 아파트의 원래 이름은 도요타아파트. 한문으로는 풍전(豊田,도요타)이다. 설계자 도요타다네오(豊田種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서울, 아니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다. 1931년, 그런데 건축 대장에는 늦게 등재돼 1937년으로 돼있다. 그래서 이 아파트의 나이는 94세다. 이 아파트에 대한 기록은 1950년 6.25의 한 장면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맥스 데스포(Max Desfor)로 한국전쟁의 처참한 상황을 전 세계에 타전한 종군기자다. 한국전쟁을 말할 때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넘어 남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다. 국방부 자료에는 촬영 일자가 1950년 9월26일로 추정된다. 사진 속 뒷편 흐릿한 건물이 충정아파트다. 전쟁 당시 이 아파트는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고층건물이었다. 북한 점령시에 이곳에 인민군재판소가 있어 지하에서는 양민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1970년대에 충정로가 확장되면서 잘려나간 옆면이 그대로 보인다. 뒤에 장갑차가 서울 방향으로 가다가 배후의 맨홀에서 공격하는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아현동 방향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이다. 이 길이 확장되기 전의 충정로이다. 쫓기는 인민군이 지하벙커에 숨어있다. 이 벙커에 백린연막수류탄 공격으로 튀어나온, 머리를 박박 깍은 인민군 병사가 오른쪽에 누워있다. 아마도 미국 해병에 의해 사살되고 있는 듯하다. 착검을 한 미국 해병이 벙커를 경계하고 있다.
서울 탈환 이후 이 건물은 새로운 운명을 맞는다. 인민군재판소에서 미군부대로 바뀐 것이다. 전쟁은 사람의 운명만 바꾸는 게 아니라 건물의 운명도 바꿨다. 재크(JACK, 미군정보기관, 극동고문단사령부)부대 막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아파트에서 경비를 섰던 사람이 있다. ‘서울은 만원이다’를 쓴 소설가 이호철이다. 그는 원산 태생으로 원산 고등보통학교 학생 ‘광장’을 쓴 최인훈과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 그의 삶은 기구했다. 전쟁통에 고3 학생으로 인민군에 동원돼 따발총까지 지니고 있었다는데 인민군으로 남진하다 강원도 양양에서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런데 강원도 흡곡에서 구사일생으로 자형을 만났다. 허술한 시절이라 자형이 포로를 감시하는 헌병에게 말해 풀려나게 됐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갈 곳 없는 신세. 부산바닥에서 전전하다 이번에는 부산의 재크부대를 지키는 경비대에 취직했다.
그 인연으로 알고 있던 사람에게 취직을 부탁하러 온 것이다. 이 아파트가 인민군재판소에서 재크부대로 사용될 때의 이야기다. 그가 전차 운전기사에게 도요타아파트를 아느냐고 묻자, 운전사는 "저기 덩실하게 서 있는 집 보이지요? 저게 도요타아파트라는 거예요”하면서 당시의 모습을 기억한다. ‘지금은 치안본부 건물이며 그 밖에도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서있어 보일 턱이 없지만, 그때는 그냥 허허벌판 같은 황폐함 속에 4층짜리 그 건물이 제법 우람한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호철, <이호철의 문단일기> 110페이지, 프리미엄북스, 1997년)
그는 1년 사이에 따발총을 맨 인민군이었다가 미군부대 경비원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전쟁통에 우화 같은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충정아파트는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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