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선희의 미래인재 교육] 몰입과 배움의 즐거움을 빼앗긴 아이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교수는 1990년대 초반 노벨상과 퓰리처상 등을 수상하고 최고의 창의적 업적을 이룬 인물 91명에 대한 심층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목적은 창의적 성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 성향을 찾는 것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공통으로 가진 특징은 일을 하면서 몰입에 자주 빠진다는 것이었다.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이 특별한 몰입 상태를 일컫는 학문적 용어로 ‘플로(flow)’라는 개념을 창시했고, 플로에 대한 그의 연구 결과는 현재까지도 미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다.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더 나아가 학생들이 어떤 상황에서 몰입에 잘 빠지는가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서 과제의 난이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능력에 비해 너무 쉬운 과제가 주어지면 권태와 무관심에 빠지고, 반대로 너무 어려운 과제가 주어지면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학생이 몰입에 빠질 수 있는 최적의 학습 상황은 능력에 비해 ‘약간’ 더 어려운 과제가 주어질 때였다. 즉, 학생이 최고의 학습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내용의 적절한 난이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학습 조건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교과별, 학년별로 학생들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 내용이 국가교육과정과 국가성취기준을 통해 정해져 있다. 교과 전문가들은 해당 학년에서 배워야 할 적절한 난이도의 내용과 분량을 제시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생은 사교육을 통해 본인 학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지나치게 어려운 내용을 미리 학습한다. 선행학습은 학생의 능력에 비해 너무 어렵고 너무 많은 분량을 다루게 되므로 학생들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학교에서는 학원에서 이미 배운 내용을 반복 학습하므로 흥미를 느끼기가 어렵다. 이렇듯 학교에서나 학원에서 적절한 난이도의 내용을 학습하지 못하는 학생은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말하는 몰입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낮에는 학교에서, 밤에는 학원에서 같은 내용을 서너 번씩 반복 학습하는 아이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혹한 교육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고, 시험 대비 문제풀이식 공부를 하다 보니 배움의 기쁨이나 몰입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관으로 2000년부터 3년 주기로 시행하는 만 15세 대상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 의하면, 한국 학생들의 수학 성취도는 상위권이지만 수학 교과에 대한 흥미도는 하위권인 결과를 일관적으로 보인다(2003년 40개 참가국 중 수학 3위 수학흥미도 31위, 2012년 65개 참가국 중 수학 5위 수학흥미도 58위). 수학은 사교육이 가장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교과다. 선행학습부터 시작해 가장 오랜 시간 공부하며 엄청난 양의 문제 풀이를 반복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높은 성적과 낮은 흥미도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초·중·고 12년 동안 공교육과 사교육의 두 트랙을 통해 같은 내용을 두세 번씩 반복 학습하는 비정상적인 실태는 아마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관심을 갖는 ‘창의적 인재’가 나오기 어려운 교육 여건이다. 역대 모든 정부에서 과도한 사교육을 경감하기 위한 노력을 추진해 왔으나 오히려 사교육 시장은 전문화, 다양화되면서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번 정부 역시 킬러 문항 배제, 사교육 카르텔 근절 등 갖가지 사교육 경감 대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궁극적인 목표는 과도한 선행학습을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