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외치는 독일의 속내는?…"프랑스에 다 뺏길 판"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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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脫)원전 독일, 원전 반대 속내는
'기업의 탈독일' 우려
'기업의 탈독일' 우려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는 에너지 분야 소식을 국가안보적 측면과 기후위기 관점에서 다룹니다.
유럽연합(EU)의 양대 강국 독일과 프랑스가 원자력발전 해법에 관해 수개월째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EU가 프랑스의 원전 보조금 등을 인정해줘서는 안 된다"며 반(反)원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의 반대가 원전의 친환경성·안전성 여부를 문제삼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프랑스 제조업체들이 원전 덕분에 독일 기업들에 비해 훨씬 안정적인 전기요금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다. 프랑스는 "독일이 자국의 값비싼 전기요금을 피하려는 기업체들의 이탈을 우려해 전 세계적인 원전 부흥 조짐에 사활을 걸고 어깃장을 놓는 것"이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간 EU 역내 전기 소매 시장은 러시아산 가스 수입에 의존해온 탓에 가스 도매 가격의 변동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개혁의 핵심은 에너지 도매 시장으로부터 소비자, 사업체 등을 '분리'해 소매전력 가격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안정화하는 데 있다. 기골트 차관은 "모든 회원국들이 탈탄소화, 에너지 가격 안정화, 새로운 발전소 투자 등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면서도 "원전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대치 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더 큰 타협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그 타협점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EU는 지난해 그린택소노미(녹색 산업 분류체계·친환경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산업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 개정안에서 원전을 최종적으로 포함시켰다. 하지만 프랑스는 "원전이 그린택소노미의 범주에 들어가긴 했지만 신재생에너지 등 다른 에너지원과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 상황"이라며 "전력시장개혁안에서 EU는 화석연료가 아닌 에너지원들을 차별 대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전이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과 동일한 수준의 경쟁력을 보장받을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쟁점이 되는 규정은 양방향 차액결제거래(CFD)다. 이 계약 시스템은 에너지 발전소와 국가기관이 사전에 에너지 가격을 합의하고 차액에 대해서는 사후 정산하는 방식이다. 시장가격이 높을 때는 발전소의 수익을 제한하고 대신 시장가격이 낮을 때는 국가기관이 발전소에 차액을 지급함으로써 소비자와 에너지 산업 모두에 장기적인 가격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될 예정이다. 프랑스는 신규 원자로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형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에 대해서도 CFD 규정이 적용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독일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 프랑스가 특별 기금이나 국가 예산을 동원해 원전이 거둔 CFD의 수익을 소비자들에 분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기골트 차관은 "CFD 시스템은 이미 감가상각이 끝난 기존 설비가 아니라 신규 투자처에 활용돼야 하는 수단"이라며 "우리에게 CFD 시스템은 에너지원의 형태에 관계없이 새로운 투자를 지원하는 도구"라고 지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최근 한 연설에서 "전기요금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혼자서라도 싸우겠다"며 독일을 겨냥한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독일 최대 알루미늄 제조업체 트리메트(Trimet)는 지난해 에너지 위기로 인해 생산량을 대폭 줄였다. 그러다 올해 6월 상황이 반전됐다. 프랑스 EDF가 트리메트의 프랑스 제련소에 "앞으로 10년간 시장가격보다 저렴하게 전력을 공급하겠다"고 나서면서다. 필리프 슐뤼터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저렴한 원전 덕분에 친환경 전환 추진을 가속화할 수 있다"며 프랑스를 추켜세워 독일 정계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독일의 값비싼 전기요금 등으로 인해 지난 2년 간 프랑스가 독일보다 50%가량 더 많은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유럽정책연구센터(CEPS)의 크리스티안 에겐호퍼 선임연구원은 "양국의 정부에게 저가의 전력수급 문제는 정치적 생존이 걸린 문제나 다름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유럽전기사업자협회 사무총장 크리스티안 루비는 "독일과 프랑스 간 갈등의 핵심은 산업경쟁력"이라며 "프랑스가 원전을 통해 향후 수년 동안 기업들에 저렴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일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또한 올해 4월 마지막 원자로 3곳의 가동을 중단한 뒤 프랑스로부터 상반기에만 총 4.4테라와트시(TWh)의 전력을 수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국의 에너지 갈등은 앞서 여러차례 불거졌다. 자동차 제조 강국인 독일은 '2035년까지 내연기관차를 시장에서 퇴출한다'는 EU 법안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이후 올해 3월 '합성연료 내연기관차'에 대한 예외 조항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원전 기반 수소(핑크수소)를 신재생에너지원인 친환경 수소의 일종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유럽의회는 입법 과정에서 수차례 진통을 겪은 끝에 지난달 "핑크수소의 기여를 일부 인정한다"는 내용 등이 담긴 재생에너지 지침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유럽연합(EU)의 양대 강국 독일과 프랑스가 원자력발전 해법에 관해 수개월째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EU가 프랑스의 원전 보조금 등을 인정해줘서는 안 된다"며 반(反)원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의 반대가 원전의 친환경성·안전성 여부를 문제삼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프랑스 제조업체들이 원전 덕분에 독일 기업들에 비해 훨씬 안정적인 전기요금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다. 프랑스는 "독일이 자국의 값비싼 전기요금을 피하려는 기업체들의 이탈을 우려해 전 세계적인 원전 부흥 조짐에 사활을 걸고 어깃장을 놓는 것"이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프랑스 "원전에 차별대우 말라"
스벤 기골트 독일 경제기후부 차관은 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우리는 에너지 정책 문제에 관해 프랑스와 대타협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은 뒤 EU 집행위가 올해 3월 처음으로 전력시장개혁안 초안을 발표했지만, 양국의 갈등으로 최종 입법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을 의식한 발언이다.그간 EU 역내 전기 소매 시장은 러시아산 가스 수입에 의존해온 탓에 가스 도매 가격의 변동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개혁의 핵심은 에너지 도매 시장으로부터 소비자, 사업체 등을 '분리'해 소매전력 가격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안정화하는 데 있다. 기골트 차관은 "모든 회원국들이 탈탄소화, 에너지 가격 안정화, 새로운 발전소 투자 등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면서도 "원전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대치 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더 큰 타협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그 타협점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EU는 지난해 그린택소노미(녹색 산업 분류체계·친환경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산업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 개정안에서 원전을 최종적으로 포함시켰다. 하지만 프랑스는 "원전이 그린택소노미의 범주에 들어가긴 했지만 신재생에너지 등 다른 에너지원과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 상황"이라며 "전력시장개혁안에서 EU는 화석연료가 아닌 에너지원들을 차별 대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전이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과 동일한 수준의 경쟁력을 보장받을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쟁점이 되는 규정은 양방향 차액결제거래(CFD)다. 이 계약 시스템은 에너지 발전소와 국가기관이 사전에 에너지 가격을 합의하고 차액에 대해서는 사후 정산하는 방식이다. 시장가격이 높을 때는 발전소의 수익을 제한하고 대신 시장가격이 낮을 때는 국가기관이 발전소에 차액을 지급함으로써 소비자와 에너지 산업 모두에 장기적인 가격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될 예정이다. 프랑스는 신규 원자로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형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에 대해서도 CFD 규정이 적용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독일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 프랑스가 특별 기금이나 국가 예산을 동원해 원전이 거둔 CFD의 수익을 소비자들에 분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기골트 차관은 "CFD 시스템은 이미 감가상각이 끝난 기존 설비가 아니라 신규 투자처에 활용돼야 하는 수단"이라며 "우리에게 CFD 시스템은 에너지원의 형태에 관계없이 새로운 투자를 지원하는 도구"라고 지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최근 한 연설에서 "전기요금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혼자서라도 싸우겠다"며 독일을 겨냥한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실상은 산업패권 둘러싼 獨·佛다툼
블룸버그통신은 "양국의 갈등은 겉보기에는 원전 보조금에 대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산업 패권을 누가 가져오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전했다. 독일 경제장관 로베르트 하벡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최근 "우리가 이견을 보이는 핵심 이유는 프랑스의 원전 운영사 EDF가 국영기업이라는 점에 있다"며 "프랑스 원전이 국가 지원을 토대로 시장가격보다 저렴한 전기요금을 제시하면 화학·철강 등 에너지 집약 기업들이 많은 독일은 산업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독일 최대 알루미늄 제조업체 트리메트(Trimet)는 지난해 에너지 위기로 인해 생산량을 대폭 줄였다. 그러다 올해 6월 상황이 반전됐다. 프랑스 EDF가 트리메트의 프랑스 제련소에 "앞으로 10년간 시장가격보다 저렴하게 전력을 공급하겠다"고 나서면서다. 필리프 슐뤼터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저렴한 원전 덕분에 친환경 전환 추진을 가속화할 수 있다"며 프랑스를 추켜세워 독일 정계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독일의 값비싼 전기요금 등으로 인해 지난 2년 간 프랑스가 독일보다 50%가량 더 많은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유럽정책연구센터(CEPS)의 크리스티안 에겐호퍼 선임연구원은 "양국의 정부에게 저가의 전력수급 문제는 정치적 생존이 걸린 문제나 다름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유럽전기사업자협회 사무총장 크리스티안 루비는 "독일과 프랑스 간 갈등의 핵심은 산업경쟁력"이라며 "프랑스가 원전을 통해 향후 수년 동안 기업들에 저렴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일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또한 올해 4월 마지막 원자로 3곳의 가동을 중단한 뒤 프랑스로부터 상반기에만 총 4.4테라와트시(TWh)의 전력을 수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국의 에너지 갈등은 앞서 여러차례 불거졌다. 자동차 제조 강국인 독일은 '2035년까지 내연기관차를 시장에서 퇴출한다'는 EU 법안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이후 올해 3월 '합성연료 내연기관차'에 대한 예외 조항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원전 기반 수소(핑크수소)를 신재생에너지원인 친환경 수소의 일종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유럽의회는 입법 과정에서 수차례 진통을 겪은 끝에 지난달 "핑크수소의 기여를 일부 인정한다"는 내용 등이 담긴 재생에너지 지침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