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panya, 『모형 마을』
책장 정리도 했다. 겨울 솜 이불을 담아 두는 커다란 가방 두 개가 꽉 찰 만큼 많은 책을 골라냈다. 고구마 캐기, 깻잎 따기, 양봉장 돌보기, 추석 선물용 꿀 소분하기, 책 읽고 글 쓰기, 산책하기, 모자 쇼핑, 오랜만의 가족들 집 방문, 고양이 목욕, 농구하기, 요리하기…….
연휴에는 쉽사리 지치지도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밤늦도록 축구 경기를 본 뒤 새벽같이 할머니네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싣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10월 4일 수요일 새벽에는 잠에서 자주 깼다. 이제 곧 출근이구나! 출근을 앞두고 가슴이 답답할 때면 나는 그 상태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많은 형식을 부여한다. 한동안은 ‘미소 주간’을 선정해 이번 주는 무슨 일이 닥쳐와도 일단 미소 짓고 보자고 다짐하기도 했고 (잘 안 되었다.) 또 한동안은 성경 구절을 붙잡고 초조해질 때마다 되뇌기도 했다.
이번 연휴 끝에 나의 형식이 되어 주었던 것은 축구선수 손흥민이 속한 팀 토트넘의 감독 엔제 포스테코글루의 승리 후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어떻게 선수들에게 효과적으로 동기 부여를 하느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월드클래스 선수들을 상대방으로 맞을 때에는 용기가 당연히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축구에서 용기라는 것은 약간 오해받을 수 있는 요소이기 쉬운데 아무도 공을 받고 싶지 않을 때 공을 원하는 것입니다.”
지하철 맨 끝 칸 문 앞에 서서 나 또한 용기를 다졌다. 아무도 공을 받고 싶지 않을 때 공을 원하는 마음으로 용기를 갖고 기꺼이 메일함을 열고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4시쯤 되자 연휴 중에도 틈틈이 맘 졸였던 일들이 그럭저럭 (일단은……) 마무리되었다.
나는 긴 연휴의 다음 날 나와 같은 용기를 내고 있을 친구들에게 엔제 감독의 인터뷰 캡처본을 전송해 주었다. 그렇게 하루가 무사히 끝났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력을 제공하는 그것이 바로 형식”(강보원, 「에세이의 준비」)이라는 말처럼 나 역시 스스로 부여한 형식으로부터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

원칙은 우연히 착륙한 곳에서 주민들에게 위치를 직접 묻지 않고 오직 주변 기물들만으로 이곳이 어딘지 추측해 보는 것이다. 주인공과 그의 동료는 이름 모를 산 정상에 불시착한 뒤 이제 그럼 이 산 이름이 무엇인지 추론해 보기로 한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꼭대기에 커다란 깃발을 꽂아 두고 겨우 하산에 성공한 둘. 식당에서 주문을 하려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둘은 그 마을에서 몸으로 이런저런 일을 부딪쳐 가며 언어를 익히는 데 성공하고,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 언어를 익혔으니 이번만 예외적으로 직접 물어보는 것도 “훌륭한 자력 조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협의에 이른다. 한 주민에게 묻자 그는 주인공과 그의 동료가 내려온 산의 이름이 ‘깃발 산’이라 답한다. 원래는 이름이 없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커다란 깃발이 세워져 그 이후로 ‘깃발 산’이라 부르고 있다고. 주인공과 그의 동료는 잠시 벙찐 얼굴을 해 보이고는 하던 식사를 마치고 산 정상에 주차해 둔 비행선 쪽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이름이 붙여진 ‘깃발 산’ 정상으로.
규칙을 정한 뒤 그에 입각해 쓰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때 규칙은 이상한 무늬가 그려진 선글라스와 같아서 그것을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닥친 일과 풍경들이 달리 보이고는 한다. 연휴 끝에서 나의 어깨를 토닥여 준 엔제 감독의 인터뷰는 며칠만 지나도 점점 힘을 잃을 테니, 나는 이다음의 형식을 찾아 또 이곳저곳을 걸어 보거나 이것저것을 관람해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또 달리 이어질 삶 글 사랑 친구 시간 들이 있겠지. 『모형 마을』 외에도, 판판야의 모든 만화에는 제힘으로 만들어 낸 형식으로부터 펼쳐지는 뜻밖의 모험들이 가득하다. 나는 판판야의 만화가 내게 용기를 심어 주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