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마음이 약한 이에게 슬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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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속에 눈물 흘리던 청년
삶을 분실한 지하철 속의 여인
모질지 못해서 죽은 마광수
사이코·소시오패스 넘쳐나는
정치권과 더 끔찍한 지지자들
당신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이응준 시인·소설가
삶을 분실한 지하철 속의 여인
모질지 못해서 죽은 마광수
사이코·소시오패스 넘쳐나는
정치권과 더 끔찍한 지지자들
당신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이응준 시인·소설가
커피 바리스타 청년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의 손은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다. 다만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내 그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울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사람으로 되돌아간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홀로 눈물을 흘리는데 그걸 나만 바라볼 때가 있다. 소설가는 이런 것을 포착해내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재능이 ‘인간적 의무’가 됐을 때 소설가는 비로소 ‘작가’가 된다.
저 청년은 무슨 슬픈 일이 있기에 침묵 속에서 울고 그걸 무관심 속에 감췄을까? 어제 한낮에는 한 여자가 계속 중얼거리고 소리치며 내가 서 있는 지하철 칸에서 내 옷깃을 스쳐 다른 칸으로 건너갔다. 인류는 스마트폰 속으로 얼굴을 처박고 귀에 촛농으로 밀봉을 하고 있기에 나 같은 외계인 말고는 그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질 않는다. 세상을 견딜 수 없지만 죽지는 못할 적에 사람은 실성하게 된다. 상처에 물든 혼란한 말들을 허공에 내뱉으며 자기 안에 갇힌 채 사람들 사이를 배회한다. 무슨 아픈 일이 있기에 그 여인은 삶을 분실한 것일까?
지난 9월 5일은 고(故)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의 기일(忌日)이었다. 그는 2017년 그날 이른 오후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 방범창에 스카프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1992년 10월, 이 사회의 윤리를 파괴하는 음란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강의실에서 수업 중 영장도 없이 긴급 체포 구속된 이후의 온갖 환란(患亂)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법정에서 그의 소설은 헌법이 보호할 필요가 없는 법적 폐기물에 불과하다고 감정했던 한 서울대 법대 교수는, 지난 정권 초 법무부 장관 후보에 올랐다가 과거 자기가 따라다니는 어느 여성을 무단으로 혼인신고 해버린 짓이 문제가 돼 낙마했다. 그 자의 산문들 속 여성관은 안티 페미니스트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검사는 마 교수에게, 나는 집에 책이 2000권이 있어서 당신 죄를 딱 보면 안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철물점 사장이 의사(醫師) 앞에서 나는 병원 영수증이 2000장 있으니 너보다 의학에 대해 정통하다고 말한 셈이다.
마광수 교수는 여성들에게 젠틀했다. 정의와 도덕을 흉기로 휘두르는 지식인들이나 일부 검은 검사들 같지 않았다. 마광수에 대한 린치에는 소위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심지어는 가장 리버럴해야 할 예술가들마저도 그를 외면하고 가학했다. 그의 소설은 요즘 같으면 음란이라기보다는 코미디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마광수는 시대를 앞서 나간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가 후기 조선이었고 그에게는 ‘패거리’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마광수 문학은 안중에 없지만, 현대문학과 자유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필화(筆禍)를 입은 그에게 같은 작가로서 특별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이러한 죄책감의 성격이 변질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그의 소설에 대한 탄압을 비판한 내 입장이, 마음이 약한 사람에 대한 복잡한 심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을 뜻한다. 정치권 안에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들이 넘쳐나고 그 지지자들은 더 끔찍하다. 어쩌면 대중 전체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잘 살려면 인간이 아니라 악어여야 했는데, 마광수는 모질지 못해서 죽었다. 여려서 죽은 것이다.
한국 사회는 요한복음의 예수가 “너희들 중 죄 없는 자는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하면 우르르 몰려가 돌로 쳐 죽이는 사회다. TV에서 생전에 마 교수가, 그동안 당신을 도와준 사람들은 없냐는 질문을 받자 “좋은 분들이 있으니 제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거죠” 그러는 걸 보았더랬다. 결국 그의 죽음을 막을 만큼은 좋은 사람들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된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태도다”라고 조지 오웰은 말했지만, 새로운 가을에는 지긋지긋하고 더러운 정치 얘기가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의 비극을 설명하고 싶었다.
특별히 선한 시대는 없어도 특별히 악한 시대는 있다. 이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누구인가? 마음 약한 사람이 눈물로도, 미치는 것으로도 감당이 안 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사회에서는 소설가의 재능도, 작가의 인간적 의무마저도 그저 외로운 슬픔에 불과하다.
저 청년은 무슨 슬픈 일이 있기에 침묵 속에서 울고 그걸 무관심 속에 감췄을까? 어제 한낮에는 한 여자가 계속 중얼거리고 소리치며 내가 서 있는 지하철 칸에서 내 옷깃을 스쳐 다른 칸으로 건너갔다. 인류는 스마트폰 속으로 얼굴을 처박고 귀에 촛농으로 밀봉을 하고 있기에 나 같은 외계인 말고는 그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질 않는다. 세상을 견딜 수 없지만 죽지는 못할 적에 사람은 실성하게 된다. 상처에 물든 혼란한 말들을 허공에 내뱉으며 자기 안에 갇힌 채 사람들 사이를 배회한다. 무슨 아픈 일이 있기에 그 여인은 삶을 분실한 것일까?
지난 9월 5일은 고(故)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의 기일(忌日)이었다. 그는 2017년 그날 이른 오후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 방범창에 스카프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1992년 10월, 이 사회의 윤리를 파괴하는 음란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강의실에서 수업 중 영장도 없이 긴급 체포 구속된 이후의 온갖 환란(患亂)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법정에서 그의 소설은 헌법이 보호할 필요가 없는 법적 폐기물에 불과하다고 감정했던 한 서울대 법대 교수는, 지난 정권 초 법무부 장관 후보에 올랐다가 과거 자기가 따라다니는 어느 여성을 무단으로 혼인신고 해버린 짓이 문제가 돼 낙마했다. 그 자의 산문들 속 여성관은 안티 페미니스트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검사는 마 교수에게, 나는 집에 책이 2000권이 있어서 당신 죄를 딱 보면 안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철물점 사장이 의사(醫師) 앞에서 나는 병원 영수증이 2000장 있으니 너보다 의학에 대해 정통하다고 말한 셈이다.
마광수 교수는 여성들에게 젠틀했다. 정의와 도덕을 흉기로 휘두르는 지식인들이나 일부 검은 검사들 같지 않았다. 마광수에 대한 린치에는 소위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심지어는 가장 리버럴해야 할 예술가들마저도 그를 외면하고 가학했다. 그의 소설은 요즘 같으면 음란이라기보다는 코미디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마광수는 시대를 앞서 나간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가 후기 조선이었고 그에게는 ‘패거리’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마광수 문학은 안중에 없지만, 현대문학과 자유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필화(筆禍)를 입은 그에게 같은 작가로서 특별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이러한 죄책감의 성격이 변질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그의 소설에 대한 탄압을 비판한 내 입장이, 마음이 약한 사람에 대한 복잡한 심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을 뜻한다. 정치권 안에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들이 넘쳐나고 그 지지자들은 더 끔찍하다. 어쩌면 대중 전체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잘 살려면 인간이 아니라 악어여야 했는데, 마광수는 모질지 못해서 죽었다. 여려서 죽은 것이다.
한국 사회는 요한복음의 예수가 “너희들 중 죄 없는 자는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하면 우르르 몰려가 돌로 쳐 죽이는 사회다. TV에서 생전에 마 교수가, 그동안 당신을 도와준 사람들은 없냐는 질문을 받자 “좋은 분들이 있으니 제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거죠” 그러는 걸 보았더랬다. 결국 그의 죽음을 막을 만큼은 좋은 사람들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된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태도다”라고 조지 오웰은 말했지만, 새로운 가을에는 지긋지긋하고 더러운 정치 얘기가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의 비극을 설명하고 싶었다.
특별히 선한 시대는 없어도 특별히 악한 시대는 있다. 이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누구인가? 마음 약한 사람이 눈물로도, 미치는 것으로도 감당이 안 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사회에서는 소설가의 재능도, 작가의 인간적 의무마저도 그저 외로운 슬픔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