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킬리언의 ‘프티 모르’
이리 킬리언의 ‘프티 모르’
“빌리, 여자들에겐 정상적이지만 남자들에겐 아니야. 남자는 축구, 권투, 레슬링을 해야 하는 거야. 발레는 남자가 하는 게 아니야.”

19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에 빠진 소년 빌리에게 아빠가 분노하며 건넨 말이다. 아빠의 말은 어쩌면 지금도 많은 사람이 발레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런데 틀렸다. 발레는 그 태생부터 ‘남자의 춤’이었다. 발레에 대한 여러분의 편견을 180도 바꿔놓을 정보들을 모아봤다.

발레는 여자의 것? 원래 남자 춤이야

마리 슈이나르의 ‘사이 톰블리 섬하우’ /사진=몬테카를로 발레단 홈페이지
마리 슈이나르의 ‘사이 톰블리 섬하우’ /사진=몬테카를로 발레단 홈페이지
‘발레’ 하면 뒤집힌 우산처럼 생긴 흰 치마 ‘튀튀’가 떠올라서일까. 아직도 발레리노를 보는 시선은 대체로 낯설고 어색한 게 사실이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발레가 탄생했을 땐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의 활동이 자유롭지 않던 때인 데다 초창기 발레는 나라의 부를 다른 나라에 과시하기 위한 왕궁의 사교춤이었다. 남성 무용수들이 귀족 앞에서 추는 춤이었던 것. 이탈리아 귀족 사회에서 유행하던 발레는 1553년 14세 때 프랑스 왕궁으로 시집간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느 왕비에 의해 프랑스로 전파됐다. 이탈리아 발레 음악가를 프랑스로 데려와 무대에 올리면서 최초의 공식적인 발레 작품 ‘여왕의 발레극’(1581)이 탄생했다. 최초의 궁정 발레 형식은 그 후로 100년이 지나서야 극장이 생겨나며 왕궁 밖으로 나오게 됐다.
마리 슈이나르의 ‘사이 톰블리 섬하우’ /사진=몬테카를로 발레단 홈페이지
마리 슈이나르의 ‘사이 톰블리 섬하우’ /사진=몬테카를로 발레단 홈페이지

이탈리아→프랑스→러시아로

볼쇼이 발레단 때문인지 발레의 본거지를 러시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발레는 원래 서유럽의 전유물이었다. 1700년대 말부터 1800년대 초까지 오페라나 연극의 부속품이 아니라 독립된 예술 장르로 발전했다. ‘라 실피드’와 ‘지젤’과 같은 낭만 발레가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에 꽃을 피웠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돌아다니는 요정, 흰 달빛 아래 가녀리고 창백한 요정들이 떠다니듯 움직이는 장면처럼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장면이 모두 이 시기에 탄생했다.

프랑스가 낭만 발레의 틀을 잡았다면, 러시아는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세계적인 고전 발레 명작을 탄생시켰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규칙과 원칙이 특징이다. 독일의 한 발레단이 러시아 황궁에서 처음 공연한 것을 시작으로, 발레의 매력에 빠진 러시아 황제들이 유럽 발레단을 끊임없이 초청했다. 이후 볼쇼이 극장(1776년), 키로프 마린스키 극장(1783년)이 세워지며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후 유럽에서 발레 인기가 시들해지자 유럽의 무용수와 안무가들이 러시아로 건너와 활동했다. 쥘 페로(지젤), 생 레옹(코펠리아), 마리우스 프티파(백조의 호수) 등이 차이콥스키와 같은 뛰어난 러시아 작곡가들과 협업하며 ‘고전 발레’ 형식을 완성하고 러시아를 세계 발레의 중심지로 만든다. 그런 러시아 발레는 1909년 당대 최고의 무용수들을 모아 35명의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단)’를 꾸려 파리 무대에 데뷔한다. 어마어마한 점프 실력을 선보인 바츨라프 니진스키를 중심으로 힘차고 신비로운 발레 레퍼토리를 본 파리지앵들은 열광했고, 이 사건은 이후 러시아와 서유럽 예술가들이 세기의 협업을 하는 계기가 됐다.

“몸이 가장 아름답다”…‘모던 발레’의 거장들

장 크리스토프 마요의 ‘코펠리아’
장 크리스토프 마요의 ‘코펠리아’
20세기엔 유럽에서 활동하던 ‘발레 뤼스’ 멤버들이 미국과 유럽 전역으로 흩어져 모던 발레를 만든다. 조지 발란신은 미국에서 ‘보석’ ‘아폴로’ ‘세레나데’ 등을 선보이며 뉴욕시티발레의 전신인 아메리칸발레단을 창단했고, 유럽에선 모리스 베자르가 ‘볼레로’나 ‘봄의 제전’과 같은 음악을 주제로 극적 장면을 강조한 새로운 형식의 발레 시어터를 선보이며 인기를 끌었다. 네덜란드의 이리 킬리안은 현대 무용 동작과 발레 동작이 절반씩 섞인 듯한 작품을 내놓는가 하면, 스웨덴 마츠 에크는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를 정신이상자의 시각으로 바꿔 연출했다. 장 크리스토프 마요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자유로운 표현과 기교에 새로운 캐릭터 해석을 더해 영화 같은 발레로 재탄생시켰다. 모던 발레의 안무가와 연출가들은 “사람의 몸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춤의 본질로 돌아갔다. ‘몸’ 그 자체를 돋보이게 하는 간결한 의상과 무대, 조명 등을 주로 쓴다. 발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입 튀튀도 벗어 던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모던 발레를 만날 땐 무용수들의 표정과 몸짓, 우리 몸이 원래 가진 그 본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게 최고의 감상법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