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로 돌아온 판빙빙 "여성들이여, 두려워 말라"
‘녹야(綠夜)’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전부터 큰 화제를 모은 작품 중 하나다.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작품들을 소개하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오른 이유가 있다. 2018년 실종설이 돌고 5년간 잠적했던 중국의 인기 배우 판빙빙이 등장해서다. 그는 이 작품에서 한국 배우 이주영과 사랑을 나누는 퀴어 연기를 선보였다.

올해 국내 개봉을 앞둔 ‘녹야’는 한마디로 ‘여자들의 영화’다. 경제적 궁핍과 성폭력에 시달리는 두 여성이 극을 이끈다. 남성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 이들의 연대와 사랑을 그린 로드무비다.

녹야는 여성 감독 한슈아이의 두 번째 장편으로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 ‘희미한 여름’은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서 수상했다. 한국과의 인연은 이번 영화에서도 이어졌다. 감독은 배우 이주영을 판빙빙의 파트너로 발탁했고, 촬영도 한국에서 했다.

이야기는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에서 일하는 진샤(판빙빙 분)의 어눌한 한국어로 시작한다. 이마엔 반창고를 붙이고 여기저기 멍이 든 모습이다. 남편이 휘두른 폭력에 시달린 탓이다. 진샤는 독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보낸다.

그의 삶은 초록머리 여자(이주영 분)를 만나며 송두리째 바뀐다. 그 역시 마약 밀매상 남성에게 잡혀 운반책으로 사는 신세였다. 외양부터 성격까지 모든 게 달랐던 이들은 손을 맞잡는다. 그들을 구속하는 남자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영화의 상징색은 초록이다. 제목 ‘녹야’는 우리말로 ‘초록색 밤’이라는 뜻. 초록머리 여자는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의 문신, 손톱 발톱까지 온통 녹색으로 물들였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겉모습은 그의 자유분방함을 나타내면서도, 평화와 안정을 향한 여성들의 염원을 드러낸다.

두 여성은 끊임없이 도망간다. 정확히 누가 이들을 쫓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남성 인물들은 사회 속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이들을 서서히 죄어온다. 감독은 시사회 직후 열린 간담회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누군가로부터 계속 통제받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줄거리 전개 방식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는 로드무비의 특성상 우연에 기대는 요소가 많다. 진샤와 초록머리 여자가 크게 다투고 헤어진 뒤 다시 만나는 장면,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공간에 들어서는 과정 등 많은 부분에서 개연성이 생략됐다. 다소 혼란스러운 전개와 별개로, 작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영화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여성아”란 진샤의 독백을 되풀이하며 끝난다. 배우 판빙빙은 “감독과 주연 배우, 통역까지 전부 여성으로 꾸려진 팀이 완성한 영화”라며 “때론 여성만이 여성을 진정 돕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부산=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