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撲棗謠(박조요), 李達(이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원시]
撲棗謠(박조요)
李達(이달)
隣家小兒來撲棗(인가소아래박조)
老翁出門驅小兒(노옹출문구소아)
小兒還向老翁道(소아환향노옹도)
不及明年棗熟時(불급명년조숙시)
[주석]
* 撲棗謠(박조요) : 대추 서리 노래. ‘撲棗’는 대추를 턴다는 뜻이지만, 시의(詩意)를 참작하여 대추 서리 혹은 대추를 서리한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 李達(이달) :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이다. 이첨(李詹)의 후손으로,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처음에는 정사룡(鄭士龍)에게 소식(蘇軾)의 시를 배웠고, 나중에 박순(朴淳)에게 당시(唐詩)를 배웠다.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말년에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 남매에게 시를 가르쳤으며, 근체시 가운데서 특히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 還(환) : 다시 도리어. / 向(향) : ~에게, ~를 향해. / 道(도) : 말하다.
* 不及(불급) : ~까지 가지 못하다. 여기서는 ~까지 살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 明年(명년) : 명년, 내년. / 棗熟時(조숙시) : 대추가 익을 때.
[번역]
대추 서리 노래
이웃집 아이가 와서 대추를 서리하자
노인이 문을 나와 아이를 쫓는구나
아이가 되려 노인에게 하는 말이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살지도 못할 거면서”
[번역노트]
몇 해 전에 어떤 모임에서 역자가 이 시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아이도 나쁘지만 노인도 고약하다고 해서 좌중이 때아닌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문제를 제기한 그 지인의 뜻은 이러했다. 이웃집 아이가 와서 대추 서리하는 걸 알았다면 몇 개 따가게 내버려 두지 굳이 쫓으려다 욕보다 더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노인이 너무 각박했다는 뜻이다. 과연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 시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대추를 어떻게 수확하는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추는 매실(梅實)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따는 과일이 아니라 막대 따위로 쳐서 터는 과일이다. 그 크기가 작기도 하지만 많이 열리는 데다, 가느다란 가지가 높은 데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왜 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지는 아래에서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다음으로 확인이 필요한 사항은 노인이 문(門)을 나온 이유이다. 대추를 따서 먹을 수 있는 시기를 기준으로 따져보자면 ‘서리 사건’이 생긴 어느 가을날에, 노인은 문을 닫은 상태로 방 안에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웃집 아이가 와서 대추를 서리한다는 사실을 노인은 어떻게 알고 문을 나오게 된 것일까? 그것은 시에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은 대추 터는 ‘소리’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웃집 아이가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와 대놓고 대추를 터는 통에 소리가 제법 크게 났을 것이고, 그 소리가 마침내 방 안까지 들려 노인이 문을 열고 내다본 뒤에 아이를 쫓고자 문을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주석에서 이미 언급했던 바이지만, 원시의 “來撲棗(내박조)”가 ‘와서 대추를 서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추를 서리하러 왔다’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면, 노인이 마당이거나 문이 열린 방 안에서 대추를 서리하러 온 아이를 발견하고는 방문이든 대문이든 열고 나와 아이를 쫓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라면 이웃집 아이의 손에는 대추를 서리하기 위한 막대기와 서리한 대추를 담을 자루 따위가 들려 있었거나, 아이가 대추를 서리하려고 한 동작을 이미 들켜버렸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역자는 이 경우는 논외로 하고 ‘와서 대추를 서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감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시에서 만일 ‘출문(出門:문을 나오다)’이 아니라 ‘개문(開門:문을 열다)’이라고 했다면, 문을 나가지 않고 아이를 쫓았다는 뜻이 되므로 아이를 소극적으로 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라면 후속되는 아이의 고약한 말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범해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出門’이라는 말에 시인의 뜻이 숨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역자 생각에는 문을 나와 아이를 쫓은 노인의 적극성은 노인의 각박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서리를 하는 아이의 과도한 행위를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물론 이 노인의 적극성이 아이의 고약한 말을 이끈 도화선(導火線)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손이 닿는 자리에 있는 대추 몇 알을 따서 먹는 정도를 서리라고 할 수 있다면, 막대기로 터는 행위는 서리를 넘어 거의 절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이웃집 아이의 서리를 대추를 딴다는 의미의 ‘적조(摘棗)’라고 하지 않고, 대추를 턴다는 의미의 ‘박조(撲棗)’라고 한 것은, 아이의 행위가 지나친 것임을 넌지시 암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추나무 가지가 너무 높은 탓에 손이 닿지 않아 부득이 막대기 같은 것을 사용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혹시라도 주인집 누군가가 들을세라 조심하지도 않고, 마치 자기 집 대추나무 털 듯이 행동한 아이의 과도한 서리는 ‘행위의 대담성’을 얘기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에 노인이 아이를 적극적으로 혼내며 쫓았을 것이다.
역자가 보기에는 아이의 ‘행위의 대담성’도 문제지만,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언어의 대담성’이다. 어린 시절에 적잖이 서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역자로서는 아이와 같은 언어의 대담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서리를 하다가 혹 들키기라도 하면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못된 행위임을 스스로 알아, 그 어떤 군소리도 없이 잽싸게 도망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나쁜 짓을 하는 자기 자신을 쫓는다고 하여, 노인에게 곧 죽을 사람이라고 악담을 퍼부은 이 되바라진 아이의 언어폭력을 보면서 역자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욕을 하고 심지어 선생님을 폭행하기까지 한다는 이 시대의 비뚤어진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른바 “학생인권”이라는 것을 강변하며, 그러한 제 아이의 선생님에게 갑질을 해대는 학부형의 행태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갑질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선생님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눈시울 붉히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이 저절로 불끈 쥐어지고는 한다. 누가 교육을 이토록 망가지게 하였는가?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가르쳤던 우리의 교육을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그 책임자들을 찾아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 역사 앞에서 부끄러운 죄인이 될 뿐이리라.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노라니, 이런 아이들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교육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숙제로 던져두고 나 몰라라 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찍이 청(淸)나라의 대학자 고염무(顧炎武)는 천하의 흥망에는 필부(匹夫)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天下興亡(천하흥망) 匹夫有責(필부유책)] 이 시대의 망가진 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야 교육을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교육 관련 담당자들에게 물어야겠지만, 자녀를 키우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작지만 자기 지분만큼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공부보다 고귀한 인성을, 법보다 소중한 도덕을 우선시하지 못한다면, 가정 교육이든 학교 교육이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서리하는 아이의 언어폭력과 같은 것을 결코 피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역자가 오늘 소개한 이달 선생의 「撲棗謠(박조요)」는 4구로 이루어진 칠언고시로 압운자가 ‘兒(아)’와 ‘時(시)’이다.
2023. 10. 10.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撲棗謠(박조요)
李達(이달)
隣家小兒來撲棗(인가소아래박조)
老翁出門驅小兒(노옹출문구소아)
小兒還向老翁道(소아환향노옹도)
不及明年棗熟時(불급명년조숙시)
[주석]
* 撲棗謠(박조요) : 대추 서리 노래. ‘撲棗’는 대추를 턴다는 뜻이지만, 시의(詩意)를 참작하여 대추 서리 혹은 대추를 서리한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 李達(이달) :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이다. 이첨(李詹)의 후손으로,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처음에는 정사룡(鄭士龍)에게 소식(蘇軾)의 시를 배웠고, 나중에 박순(朴淳)에게 당시(唐詩)를 배웠다.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말년에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 남매에게 시를 가르쳤으며, 근체시 가운데서 특히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 隣家(인가) : 이웃집. / 小兒(소아) : 어린아이, 아이. / 來撲棗(내박조) : 와서 대추를 서리하다, 서리하러 오다.
* 老翁(노옹) : 늙은이, 노인. / 出門(출문) : 문을 나오다, 문을 나가다. / 驅小兒(구소아) : 아이를 몰다, 아이를 쫓다.* 還(환) : 다시 도리어. / 向(향) : ~에게, ~를 향해. / 道(도) : 말하다.
* 不及(불급) : ~까지 가지 못하다. 여기서는 ~까지 살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 明年(명년) : 명년, 내년. / 棗熟時(조숙시) : 대추가 익을 때.
[번역]
대추 서리 노래
이웃집 아이가 와서 대추를 서리하자
노인이 문을 나와 아이를 쫓는구나
아이가 되려 노인에게 하는 말이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살지도 못할 거면서”
[번역노트]
몇 해 전에 어떤 모임에서 역자가 이 시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아이도 나쁘지만 노인도 고약하다고 해서 좌중이 때아닌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문제를 제기한 그 지인의 뜻은 이러했다. 이웃집 아이가 와서 대추 서리하는 걸 알았다면 몇 개 따가게 내버려 두지 굳이 쫓으려다 욕보다 더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노인이 너무 각박했다는 뜻이다. 과연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다음으로 확인이 필요한 사항은 노인이 문(門)을 나온 이유이다. 대추를 따서 먹을 수 있는 시기를 기준으로 따져보자면 ‘서리 사건’이 생긴 어느 가을날에, 노인은 문을 닫은 상태로 방 안에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웃집 아이가 와서 대추를 서리한다는 사실을 노인은 어떻게 알고 문을 나오게 된 것일까? 그것은 시에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은 대추 터는 ‘소리’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웃집 아이가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와 대놓고 대추를 터는 통에 소리가 제법 크게 났을 것이고, 그 소리가 마침내 방 안까지 들려 노인이 문을 열고 내다본 뒤에 아이를 쫓고자 문을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주석에서 이미 언급했던 바이지만, 원시의 “來撲棗(내박조)”가 ‘와서 대추를 서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추를 서리하러 왔다’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면, 노인이 마당이거나 문이 열린 방 안에서 대추를 서리하러 온 아이를 발견하고는 방문이든 대문이든 열고 나와 아이를 쫓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라면 이웃집 아이의 손에는 대추를 서리하기 위한 막대기와 서리한 대추를 담을 자루 따위가 들려 있었거나, 아이가 대추를 서리하려고 한 동작을 이미 들켜버렸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역자는 이 경우는 논외로 하고 ‘와서 대추를 서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감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시에서 만일 ‘출문(出門:문을 나오다)’이 아니라 ‘개문(開門:문을 열다)’이라고 했다면, 문을 나가지 않고 아이를 쫓았다는 뜻이 되므로 아이를 소극적으로 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라면 후속되는 아이의 고약한 말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범해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出門’이라는 말에 시인의 뜻이 숨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역자 생각에는 문을 나와 아이를 쫓은 노인의 적극성은 노인의 각박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서리를 하는 아이의 과도한 행위를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물론 이 노인의 적극성이 아이의 고약한 말을 이끈 도화선(導火線)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손이 닿는 자리에 있는 대추 몇 알을 따서 먹는 정도를 서리라고 할 수 있다면, 막대기로 터는 행위는 서리를 넘어 거의 절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이웃집 아이의 서리를 대추를 딴다는 의미의 ‘적조(摘棗)’라고 하지 않고, 대추를 턴다는 의미의 ‘박조(撲棗)’라고 한 것은, 아이의 행위가 지나친 것임을 넌지시 암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추나무 가지가 너무 높은 탓에 손이 닿지 않아 부득이 막대기 같은 것을 사용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혹시라도 주인집 누군가가 들을세라 조심하지도 않고, 마치 자기 집 대추나무 털 듯이 행동한 아이의 과도한 서리는 ‘행위의 대담성’을 얘기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에 노인이 아이를 적극적으로 혼내며 쫓았을 것이다.
역자가 보기에는 아이의 ‘행위의 대담성’도 문제지만,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언어의 대담성’이다. 어린 시절에 적잖이 서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역자로서는 아이와 같은 언어의 대담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서리를 하다가 혹 들키기라도 하면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못된 행위임을 스스로 알아, 그 어떤 군소리도 없이 잽싸게 도망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나쁜 짓을 하는 자기 자신을 쫓는다고 하여, 노인에게 곧 죽을 사람이라고 악담을 퍼부은 이 되바라진 아이의 언어폭력을 보면서 역자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욕을 하고 심지어 선생님을 폭행하기까지 한다는 이 시대의 비뚤어진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른바 “학생인권”이라는 것을 강변하며, 그러한 제 아이의 선생님에게 갑질을 해대는 학부형의 행태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갑질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선생님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눈시울 붉히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이 저절로 불끈 쥐어지고는 한다. 누가 교육을 이토록 망가지게 하였는가?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가르쳤던 우리의 교육을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그 책임자들을 찾아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 역사 앞에서 부끄러운 죄인이 될 뿐이리라.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노라니, 이런 아이들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교육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숙제로 던져두고 나 몰라라 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찍이 청(淸)나라의 대학자 고염무(顧炎武)는 천하의 흥망에는 필부(匹夫)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天下興亡(천하흥망) 匹夫有責(필부유책)] 이 시대의 망가진 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야 교육을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교육 관련 담당자들에게 물어야겠지만, 자녀를 키우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작지만 자기 지분만큼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공부보다 고귀한 인성을, 법보다 소중한 도덕을 우선시하지 못한다면, 가정 교육이든 학교 교육이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서리하는 아이의 언어폭력과 같은 것을 결코 피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역자가 오늘 소개한 이달 선생의 「撲棗謠(박조요)」는 4구로 이루어진 칠언고시로 압운자가 ‘兒(아)’와 ‘時(시)’이다.
2023. 10. 10.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