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빌딩에 전시된  레픽 아나돌의 작품 ‘머신 시뮬레이션: 라이프 앤 드림스 - 희로애락’.
63빌딩에 전시된 레픽 아나돌의 작품 ‘머신 시뮬레이션: 라이프 앤 드림스 - 희로애락’.
“인공지능(AI)이 세계 최고 미술관의 1층을 점령하다니…. 이건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지난해 11월 세계 주요 외신은 일제히 이런 기사를 쏟아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모마) 1층에 걸린 높이 8m짜리 초대형 미디어아트 작품 때문이었다. 시시각각 색깔과 형태가 변하는 이 작품은 모마가 200년간 수집한 예술품 13만8000여 점은 물론 그날의 날씨, 관람객의 움직임 등 각종 데이터를 AI가 실시간으로 분석한 뒤 영상으로 내보낸다.

‘AI가 만든 것도 예술이냐’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현대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모마가 1층 로비에 AI 작품을 전시하니, 뉴스가 안 될 리 없다. 너무 많은 사람이 찾다 보니 모마는 전시 기간을 네 번이나 연장했다. 이 작품을 만든 이는 튀르키예계 미국인 작가 레픽 아나돌(38·사진). 모마에 건 작품과 비슷한 미디어아트를 서울 여의도 63빌딩 로비에 설치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한국경제신문이 만났다.
 뉴욕 MoMA 발칵 뒤집은 AI 예술가, 이번엔 63빌딩 점령했다 [이선아의 걷다가 예술]

미술계 ‘스타’가 된 ‘아웃라이어’

“저는 ‘미술계의 아웃라이어’예요. 전통 미술학교도 안 나왔고 게임과 AI에 빠진 학생이었거든요. 미술 쪽 사람들보다 실리콘밸리 사람들과 말이 더 잘 통했으니….”

63빌딩 로비에서 만난 아나돌에게 AI와 예술을 접목하게 된 배경을 묻자 유쾌한 웃음과 함께 이런 답을 들려줬다. 그의 뒤엔 50인치 TV 100대를 합친 크기(가로 12m, 세로 5.4m)의 스크린이 놓여 있었다. 화면에는 형형색색의 물감과 파도가 끊임없이 일렁였다. 제목은 ‘머신 시뮬레이션: 라이프 앤 드림스 - 희로애락’. 아나돌이 K팝 뮤직비디오 등 한국과 관련된 다양한 영상·음성 데이터 189만 건을 AI에 학습시켜 만든 것이다.

그를 AI에 빠지게 한 건 여덟 살 때 본 영화 ‘블레이드 러너’였다. 그는 “사람의 기억이 데이터베이스가 되고, 그게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콘셉트가 굉장히 신선했다”며 “그 영화를 본 뒤 계속해서 미래 세계와 기술에 대해 꿈꾸게 됐다”고 말했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아나돌의 상상은 현실이 됐다. 그는 ‘기억과 감정’이란 인간 고유의 영역을 데이터화한 뒤 기계에 학습시켰다. 그리고 이를 영상으로 제작해 예술 작품으로 선보였다. AI가 만든 빛의 조각들이 차가운 콘크리트를 수놓는 신선한 광경에 미술계는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샬럿 더글러스 국제공항(2018),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2018),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2019) 등 세계 곳곳에 있는 랜드마크가 그의 캔버스가 됐다.
지난해 11월 뉴욕 현대미술관(MoMA·모마) 1층에 걸린 레픽 아나돌의 작품.
지난해 11월 뉴욕 현대미술관(MoMA·모마) 1층에 걸린 레픽 아나돌의 작품.

“희로애락은 한국만의 독특함”

63빌딩에 전시된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형체 모를 이미지는 오묘한 음악과 함께 끊임없이 변주한다. 그는 그 안에 ‘한국인의 감정’을 담았다고 했다. ‘희로애락’이란 제목에 맞게 행복을 느낄 때 나타나는 뇌파, 불꽃놀이, 한국 전통 음악, K팝 뮤직비디오 등 각종 오픈소스 데이터를 긁어모아 제작한 AI 작품이다.

“한국은 독특하고 활력이 넘치는 곳이에요. 희로애락이란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이런 한국의 유니크함을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했죠. 이렇게 복잡미묘하고 다양한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영어에도, 제 모국어인 터키어에도 없거든요.”

AI 작품이라고 하면 클릭 한 번만으로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걸린 시간만 6개월이다. 아나돌과 그의 팀이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아나돌은 “내 생애 가장 많은 뮤직비디오를 봤다”고 했다.

‘AI 작품은 인간이 만든 거냐’는 질문에 그는 “AI 작품은 독창성과 고유성이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의 창의성이 꼭 필요하다”며 “그런 점에서 내 작업은 ‘비인간 속에서의 인간성’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예술은 모든 사람의 것”

하지만 일각에선 여전히 AI 예술에 대한 경계심도 있다. AI에 인간 고유의 창작 영역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다. 그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했다.

“AI는 예술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AI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는 지금보다 더 커지겠죠. 하지만 모두가 두려움과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기보다는 가능성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속에서 인간과 기계의 균형을 찾아 나가야 하는 거죠.”

그는 자신의 작품이 이를 한 번쯤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가 미술관이 아니라 누구나 작품을 볼 수 있는 63빌딩 로비에 전시한 이유다.

“아트 포 올(Art For All),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예술. 그게 제가 생각하는 미래의 예술입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