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씨앗 뿌린 기업가정신…K반도체·車·배터리 일궈냈다
이병철(삼성) 최종건(SK) 정주영(현대) 구인회(LG) 신격호(롯데). 맨주먹으로 거대 기업을 일구며 한국 근대화를 이끈 주인공들이다. 이들 창업회장은 각자의 경영철학을 담아 기업가정신을 정립했다. 키워드는 도전과 혁신이다. 이들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사명감을 품고 반세기 전 도전한 반도체 가전 자동차 조선 에너지 사업은 한국이 글로벌 첨단 산업을 선도하는 원동력이 됐다.

◆누구도 예상 못한 반도체·자동차 신화

이들 창업회장의 도전과 혁신이 일군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30년 연속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이 꼽힌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1983년 2월 반도체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일본 반도체기업 경영자들은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국가적 견지에서 먼저 반도체사업을 한다”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 창업회장의 유지는 이건희 선대회장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1992년 12월 사업 진출 10년 만에 D램 세계 1위에 올랐다.

“이봐, 해봤어?”란 말은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의 기업가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짓지 않은 그의 신념은 포장도로조차 흔치 않던 한국의 작은 기업 현대자동차를 세계 3위 완성차회사로 도약시키는 데 밑거름이 됐다. 세계 1위 조선 강국을 이루는 초석이 되기도 했다. 1970년 겨울, 공사도 시작하지 않은 조선소 부지를 찍은 항공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선박을 수주한 그의 배짱과 뚝심은 ‘K기업가정신’의 정수로 꼽힌다.

20년 전 시작된 투자로 최근 자동차 전자장비, 배터리 사업에서 빛을 보고 있는 LG의 뚝심은 구인회 창업회장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한층 더 큰 것, 어려운 것에 새롭게 도전하라”며 끝없는 신사업 도전을 당부했다.

◆한국만의 ‘사업보국’ 기업가정신

창업회장들을 도전과 혁신의 길로 이끈 건 그들이 가슴에 품었던 사업보국 신념의 영향이 크다. 일자리를 창출해 임직원, 더 나아가 국민의 배를 채워주고 달러를 벌어와 국가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열정이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다. 한국 기업 창업회장들의 기업가정신이 외국의 창업정신과 차별화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독특한 기업가정신은 기업 발전 과정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대표적 사례가 LG의 화학사업 진출이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1951년 플라스틱 제품 개발에 나서면서 “남이 미처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 국민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시작하라”고 주문했다. 1952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플라스틱 빗과 칫솔 등을 내놨다. 생필품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기에 국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된다.

섬유사업이 모태인 SK가 에너지, 통신 분야로 사업을 꾸준히 키우는 과정에서도 ‘한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최종건 창업회장의 사명감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임직원에게 “우리 세대의 노력이 후대를 풍요롭게 한다”며 “회사 발전이 곧 나라의 발전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회장은 투자비 회수율이 낮고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관광산업에 뛰어들었다. 관광을 통해 국력을 키우고 자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관광보국’의 신념 덕에 롯데는 호텔산업 강자로 도약할 수 있었다.

◆자원 빈국 약점을 인재경영으로 돌파

도전과 혁신 의지만으로 기업을 일으킨 건 아니다. 창업회장들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 빈국에서 외국 기업과 경쟁할 방안을 고민했다. 찾은 답은 ‘인재’였다. 한국 대기업들이 임직원 역량 강화와 복지 증진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다.

삼성의 핵심 기업가치 중 하나인 ‘인재 제일’은 이병철 창업회장의 지론에서 출발했다. 그는 “10년의 계(計)는 나무를 심는 데 있으며, 100년의 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고 말했다. LG는 ‘인화(人和·사람을 아끼고 서로 화합하라)’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인재 경영에 주력했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후대 경영인에게 “한 번 사람을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고 당부했다.

창업회장들은 장학사업에도 힘썼다. 1983년 사재 5억원을 들여 장학재단을 설립한 신격호 창업회장은 당시 “학생들이 국가와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장학사업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