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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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에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마시는 바람에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겪기도 했습니다."

전세 사기 피해자인 직장인 정인호(29)씨는 보증금을 반환받기까지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미리 모아둔 여자친구와의 결혼 준비 자금에 대출까지 더해 마련한 전세 보증금 1억4600만원을 다시 손에 넣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년. 이리저리 뛰어다닌 시간과 비용, 심리적인 압박감 등 정 씨는 "이제 전세 계약 자체가 무섭다"고 했다.

국토교통부가 최근 공개한 '전세 사기 피해자 유형별 분포' 자료를 보면 전세 사기 피해자는 대부분 정 씨와 같은 사회초년생이다. 피해자 10명 중 7명이 2030세대다. 임차보증금이 2억원 이하인 경우는 79%에 달한다. 피해자 대다수가 경제적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기에 '전세 사기'의 악몽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경닷컴은 전세 사기 피해자인 정 씨를 만나 피해 경위와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을 통한 보증금 반환 절차 및 피해 최소화 방안에 대해 들었다.

◆ 전세 계약했는데 전세가 아니다?…악랄한 '동시 계약' 수법

2021년 3월 정 씨가 계약한 집은 계약 시점으로부터 20년 전 9000만원대에 거래된 이력이 있는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소재의 낡은 빌라였다. 정 씨가 계약한 매물의 보증금은 1억4600만원. 정 씨는 물가 상승률을 고려했을 때 적정한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빌라의 특성상 거래 이력이 많지 않아 적정 전세가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던 데다, 당시 서울시 집값이 치솟아 전세 매물이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 씨가 당한 전세 사기의 유형은 '동시 계약 진행' 수법이다. 집주인인 임대인과 부동산 중개업자가 처음부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생각으로 임차인에게 접근해 계약을 맺은 경우다.

정 씨에 따르면 당시 임대인은 1억원에 집을 팔길 원했다. 하지만 해당 부동산을 관리하던 중개업자는 1억원보다 높은 1억4600만원의 보증금으로 해당 매물을 매매가 아닌 '전세' 매물로 올렸다. 이 매물을 정 씨가 계약한 것이다. 전세 계약이 체결돼 임차인으로부터 받은 보증금 중 1억원은 임대인이 갖고, 차액인 4600만원은 중개업자가 편취했다.

이후 중개업자는 미리 섭외해 둔 신용불량자 A씨의 명의로 해당 매물의 임대인을 변경했다. 이 모든 과정이 정 씨가 전입 신고를 하고 한 달 새에 벌어진 일이다.

◆ 누수 때문에 연락했더니 "집주인 아니다" 황당

정 씨가 거주하던 전세 집에 누수가 발생했을 당시의 모습. 정 씨는 집주인이 바뀐 걸 뒤늦게 알고 연락을 취했지만 쉽게 닿지 않았다. /사진=제보자 제공
정 씨가 거주하던 전세 집에 누수가 발생했을 당시의 모습. 정 씨는 집주인이 바뀐 걸 뒤늦게 알고 연락을 취했지만 쉽게 닿지 않았다. /사진=제보자 제공
정 씨가 전세 계약을 체결한 2021년 3월은 지금처럼 전세 사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던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전세 계약이었기에 등기부등본을 떼는 등 꼼꼼하게 준비했다. 당시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임대인이 해당 매물로 근저당을 설정해 대출받은 이력이 없었다. 거주하는 동안 집이 경매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조언을 듣고 전세 계약 직후인 2021년 3월 31일 전세 계약에 대한 확정일자를 받았고, 입주 직후인 5월 31일에는 전입 신고도 마쳤다.

전입 신고 후 전세보증보험도 가입했다. 정 씨는 "웹사이트를 통해 가입했고 보험료는 전세보증금 액수에 따라 다르다. 전세보증금이 100% 반환되는 상품에 가입했다. 40만원의 보험료를 지출했다"고 밝혔다.

전세난에 회사와 가까운 집을 잘 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입주 후 한 달 뒤 집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임대인이 이렇게 급하게 바뀌었다는 게 이상했어요. 마침 임대인에 연락해야할 상황도 생겼습니다. 장마철이라 베란다에서 누수가 발생했거든요. 바뀐 임대인에게 집수리를 위해 연락했는데, 본인이 집주인이 아니라며 잡아떼더군요. 이때 사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2021년 여름에 발생한 두 번의 누수는 정 씨의 자비로 해결했다. 수리 기간 동안 회사에 양해를 구해 재택근무를 했다. 집에 물이 새면서 전자레인지와 같은 소형 가전도 고장 났다. 금전적인 피해·생활의 불편함보다 더 답답한 건 임대인과 연락이 잘 안된다는 것이었다. 정 씨는 "전화·문자를 10번은 해야 한 번 연락이 닿는 수준이었다. 연락을 하면서 현 임대인이 누수 공사비조차 지불할 능력이 없는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입주 두 달 만에 전세 사기에 당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전세 사기 피해자에게 직접 듣는 보증금 반환 과정

보증금을 반환받으려면 일단 전세 계약이 만료돼야 한다. 정 씨는 "HUG에선 전세 사기를 '주택 보증사고'라고 지칭한다. 전세 계약 기간이 만료된 시점부터 한 달이 지나도록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을 때 HUG에서 보증사고로 판단한다. 전 예상치 못한 누수 덕에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지만, 그래도 달라진 건 없었다"며 "전세 계약이 끝날 때까지 이행 청구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보증사고를 입증하기 위해 먼저 임차인은 임대인에게 '계약 기간이 끝나면 집을 나가겠다'는 의미의 '퇴실 고지'를 해야 한다.

정 씨는 "계약 만료 두 달 전까지 퇴실 고지를 끝내야 한다. 그런데 임차인과 연락이 잘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용 증명을 보냈는데도 3회 이상 반송되면, 법원에서 '공시송달'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임대인이 퇴실 고지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임차인은 할 만큼 했다'고 인정해 주는 제도다. 이 과정도 3개월은 걸리기 때문에 계약이 만료되기 6개월 전부터 지속해서 퇴실 고지를 해야 한다. 사기 피해를 미리 알지 못 했다면 대응하기 어려운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퇴실 고지까지 마쳤다면 임차인은 전세 계약 만료 1개월 후인 '보증사고 발생일'에 법원에서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해야 한다. 부동산을 빌린 사실을 법적으로 인정받아 부동산에 대한 임차인의 권리를 확인하는 절차다. 정 씨는 올해 6월 29일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 그는 "퇴실 고지에 대한 내용 증명서 등 법원에서 요청하는 서류를 이용해 신청하면 된다. 임차권등기명령이 결정되는 데에 약 2개월이 소요된다. 요즘엔 보증사고가 많아 더 오래 걸린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법원으로부터 임차권등기명령 결정 통보를 받으면 HUG에 방문해 전세보증금 반환 이행 청구를 하면 된다. 정 씨는 해당 과정을 "모든 절차 중 필요한 서류가 가장 많던 과정"이라고 했다. 임대인에게 퇴실을 고지한 문자·속기사를 통한 정식 녹취록 및 내용 증명 내역·임차권등기명령 결정문·보증채무이행청구서·대위변제증서·계좌입금의뢰서·명도 확인서 및 퇴거 확인서·주택임차권등기명령 취하 및 해제 신청서와 관련 위임장·배당금 수령 관련 위임장·임대인과 임차인의 주민등록표 초본 등이 필요했다. 이 모든 서류를 준비하는 데에 약 4개월이 걸렸다고 전했다.

◆ "임대인·중개업자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당할 재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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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기준 국토부가 인정한 전세 사기 피해자는 6063명이다. 모두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피해자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을 가입한 이라면 이행 청구 후 보증금을 반환 받기까지 기다리면 된다. 정 씨의 경우 이행 청구를 신청한 날로부터 2개월 후 보증금을 모두 돌려받았다.

사기 피해를 인지하고 보증금을 돌려받기까지 꼬박 2년이 걸린 그는 전세 보증금으로는 해소하지 못하는 정신적 피해와 준비 과정으로 발생한 금전적 피해가 상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증금 반환을 위해 총 5번의 연차를 썼다. 처음 입주할 때 오래 살 계획으로 자비를 들여 한 화장실 공사와 누수 방지 시공을 했고, 보증금을 돌려 받기 전 타지로 이사를 가면서 추가로 빌린 주택 매매 자금의 이자까지 포함하면 약 1000만원 정도의 손해를 봤다. 전세 사기만 당하지 않았다면 지출할 필요가 없었던 돈"이라고 토로했다.

정 씨의 직장은 여전히 서울 한복판이지만, 전세 사기를 당한 뒤 경기 북부에 있는 집을 매매했다. 출·퇴근 시간이 왕복 두 시간가량 늘었지만 이제는 전세 계약이 두려워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정 씨는 여건상 전세 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임대차계약서에 두 가지 특약 사항은 꼭 기재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전입 신고 후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거절 처리되는 경우에는 계약을 파기한다'는 내용과 '본 임차인이 거주 중일 때 임대인이 변경되는 경우 전세 계약을 파기한다'는 조건을 꼭 특약사항으로 걸어두라"고 조언했다.

"임대인·중개업자가 사기를 치려고 작정하면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전 그나마 보험을 가입해 둔 덕에 비교적 빠르게 보증금을 돌려받은 겁니다. 제가 살던 화곡동 빌라는 국가의 소유가 됐고요. 주변 피해 사례를 들어보면 보험 가입을 못 해서 부동산이 경매에서 낙찰될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많아요. 낙찰된다고 해도 임차인은 순위가 밀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확률도 높고요."

김수영·김영리(인턴)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