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영화 '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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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따냐입니다. 저는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이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몸을 피해 왔을 때 그곳에서 바리스타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타국의 대사관에 살았다는 것은 황당해 보이지만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먼저 그 배경을 설명 드려야겠네요.그 전 해에 왕비 민비가 경복궁에서 일본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됐습니다. 고종은 그렇게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를 잃고 궁에 갇힌 포로 신세와 다름없었습니다. 곧 폐위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였죠. 몇 달을 궁리하고 생각해 낸 방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고종에게는 정치적 승부수였습니다. 자신의 신변을 보호받고 친일 내각을 해산시키고 새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거기까지였죠. 한 나라의 왕이 친히 몸을 의탁했던 러시아도 미국, 영국, 프랑스도 조선의 문제에 적극 관여하길 원치 않았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되는 길을 걸었으니까요. 어쨌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1년 남짓한 기간 저는 가까이에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지켜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했지요.

이 인물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내가 가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쓴 맛이 꼭 내 마음을 닮아서이니라.” 제가 타준 커피를 앞에 두고 그가 제게 한 말입니다.
네이버 영화 '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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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바깥세상과 신문물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고,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길 원했기 때문에 서양 외교관들을 초청해 긴 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고종에 대한 외교사절단의 인물평은 대체로 이랬습니다.
● 주변인의 조언을 듣는 부드럽고 상냥한 성품에 온순하고 다소 겁이 많다.
● 예민하고 불안해하는 성격으로 의존적이고 정국을 풀어나가는 의지와 열정이 부족해 통치 능력이 결여돼 있다.

이런 평가에 대해 고종은 다소 서운해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들은 평등한 관계에서 고종의 생각과 관심사, 열정, 지성을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저도 그를 관찰할 수 있었고 때론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제가 본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대원군의 재집권과 암살에 대한 불안을 달고 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한 마디 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모순 덩어리죠. 성실한 사람도 가식이 있고, 고결한 사람도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도 선량함이 있듯이 말이죠.
고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 위엄과 위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죠. 늘 선량하고 유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모든 면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추진되는 개혁도, 신문물 도입이라는 개화도 자신의 통제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왕으로 교육받은 인물이니 이런 생각을 마냥 비난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통치자로써 가장 큰 결점은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존적 성격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인이었던 민비에 대한 의존이 심했고 심지어는 나라의 운명도 다른 나라에 기대려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아홉 번이나 타국 대사관으로의 피난을 시도했고 그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도피였죠.
심지어 그는 여러 번 서양 외교관들에게 망명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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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면이 있는 인물이었어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있어 보이기도 했고 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보여줬거든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 의지를 밀고 나가지 못했어요.
나약함 때문이라 여겼는데 저는 어느 날 그의 본심을 엿본 것 같아 깜짝 놀랐죠.
결국 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왕권 강화와 왕실 즉, 가족의 보호였습니다. 나라와 백성은 그다음이었죠.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 인물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되더군요.
동학난이 일어났을 때 외국 군대를 불러 진압을 요청한 것도 그 이유였겠죠. 절대 왕위를 놓을 수 없다는 강한 의지와 집착.

그때부터 저는 그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어요. 그리고 생각했지요.
이 사람에게 커피는 무엇일까?
아마도 서양에서 들어온 커피는 그에게 곧 서양문명 그 자체였는지도 몰라요. 커피를 마시면서 열등감을 느꼈겠죠. 다른 의미로는 강장제이기도 했어요. 커피를 마시고 나면 뭔가 할 수 있다는 힘과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때뿐이었죠. 금세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조선을 떠난 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덕수궁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죠.
하지만 결국 일본에 나라를 갖다 바쳤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는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종에 대한 연민보다는 무능한 인물을 지도자로 가졌다는 불운으로 목숨을 잃고 희생을 치른 백성들이 떠올랐거든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왜 마땅히 스스로 지위에 맞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역사적 불행이 반복되는 것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