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서 아쉬운 롤러스케이트 계주 은메달…다음날 구토에 대인기피까지
"국민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좋은 일…긍정적으로 생각"
[전국체전] 정철원의 '세리머니 역전패' 복기…"꿈에 그리던 순간 이성잃어"
"꿈에 그리던 무대에서, 꿈에 그리던 순간이 코앞에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
14일 제104회 전남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롤러스케이트 경기가 치러지고 있는 나주스포츠파크에서 만난 정철원(27·안동시청)은 '인생 최악의 순간'을 이렇게 복기했다.

정철원은 지난 2일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됐다.

최광호(대구시청), 최인호(논산시청)와 함께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롤러스케이트 3,000m 계주에 출전한 정철원은 금메달을 코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 주자였던 그는 결승선 통과 직전 두 팔을 치켜들며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때 끝까지 스퍼트한 대만의 황위린이 왼발을 쭉 내밀었다.

대만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고, 한국 선수들은 고개를 떨궜다.

특히 정철원과 최인호는 병역 특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터여서 이들이 주인공이 된 '블랙 코미디'에는 쓴맛이 더해졌다.

정철원이 결승선을 통과하며 환호하는 사진은 아시아 전역의 인터넷 공간에 퍼졌다.

말 그대로 '해외 토픽'이었다.

[전국체전] 정철원의 '세리머니 역전패' 복기…"꿈에 그리던 순간 이성잃어"
국가대표팀 코치진과 소속팀 안동시청의 김기홍 감독에 따르면 정철원은 경기 다음 날 '공황'에 빠졌다.

오전 내내 구토를 했고, 오후에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아야 했다.

정철원은 '세상 모든 사람이 내 얘기만 수군거리는 것 같다'며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정철원에게 공항을 거쳐야 하는 귀국길은 또 하나의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열흘여 뒤 기자 앞에 선 정철원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정철원은 "지난 열흘여 동안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는 똑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수도 없이 결심했다"고 말했다.

전국체전 경기장에서 기자와 만난 실업팀 지도자들은 정철원은 트랙에서 늘 냉철하게 플레이해온 선수라며 안타까워했다.

'정철원이 결승선 통과 전 세리머니 하는 모습을 항저우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전국체전] 정철원의 '세리머니 역전패' 복기…"꿈에 그리던 순간 이성잃어"
정철원은 "솔직히 지금도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는 게 쉽지는 않다.

나뿐 아니라 동료 선수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커서 트라우마처럼 남을 것 같다"면서 "내가 그 순간, 너무도 기뻤던 것 같다.

결승선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많이 기뻐했던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어 "롤러 트랙 종목이 아시안게임에 들어온 게 13년 만의 일이었다.

(국가대표가 돼) 그 기회를 잡았고, 꿈에 그리던 무대에서, 꿈에 그리던 순간이 코앞에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블랙 코미디는 항저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날 열린 대만 전국체전에서 '2편'이 펼쳐졌다.

한국에 '눈물의 은메달'을 안긴 황위린이 이번엔 자신이 결승선 통과 직전 세리머니를 펼치다가 1,000m 우승을 0.03초 차로 놓친 것.
이 뉴스를 이날 아침에 읽고는 '아이러니'를 실감했다는 정철원은 "아마 지금 황위린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어 "황위린도 전국체전이라는 큰 대회에서 (아시안게임에 이어) 연속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니 그랬을 것이다.

난 이해한다"고 말했다.

[전국체전] 정철원의 '세리머니 역전패' 복기…"꿈에 그리던 순간 이성잃어"
나이가 다 찬 정철원은 군대에 가야 한다.

국군체육부대에는 롤러스케이트팀이 없다.

'막군'으로 다녀오면 선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정철원은 "(병역 특례 혜택을 받을)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결국 내 실수로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국민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다녀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 때문에 아쉬운 상황에 놓인 최인호 선수에게는 너무도 미안하다"고 거듭 말했다.

이날 치른 남자 10,000m 제외 경기는 열흘여 전 '악몽의 계주'를 치른 멤버 세 명이 아시안게임 뒤 처음으로 치른 실전이었다.

경기 전 정철원과 최인호는 안 좋은 기억이 계속 잔상으로 남아있는지, 다른 선수들보다 크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최인호와 정철원, 그리고 최광호는 차례로 4∼6위를 했다.

경기 뒤 셋 모두 후련하다는 듯 밝게 웃었다.

최인호와 정철원이 다른 선수들과 함께 어울려 서로 장난치며 농담하는 모습도 보였다.

항저우의 아픈 기억은 '추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