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대 아트페어 ‘프리즈’를 찾은 관람객들이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고 있다.  이선아 기자
1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대 아트페어 ‘프리즈’를 찾은 관람객들이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고 있다. 이선아 기자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17세기 걸작, ‘근대 회화의 아버지’ 세잔의 19세기 풍경화, ‘조각 거장’ 로댕의 20세기 청동 작품….

14일(현지시간) 세계적인 아트페어(미술품 장터) ‘프리즈 마스터스’가 열린 영국 런던 리젠트파크. 공원 안에 빼곡히 들어선 130여 개 부스 중 최고 인기는 단연 중세·근대 거장 작품이 걸린 갤러리들이었다. 속칭 ‘명화’로 불리는 수백 년 전 작품들의 인기는 요즘 ‘핫’한 생존 작가들의 작품을 압도했다. 이런 작품 중 상당수는 그 나라 갤러리들이 해외 ‘큰손’에게 팔려고 내놓은 것이거나 이미 해외에 판매해 소유주의 ‘국적’이 바뀐 것들이다.

하지만 국내 갤러리들에게 이런 일은 꿈 같은 일이다. 세계 최고 미술무대인 프리즈 런던에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등 한국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사실상 내놓을 수 없어서다. ‘만든 지 50년 넘은 작품을 해외로 갖고 나가려면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문화재관리법 때문이다.

◆지정문화재도 아닌데 “팔지 마라”

곽인식의 1962년 작품
곽인식의 1962년 작품
국내 메이저 갤러리 중 하나인 학고재가 이번 프리즈 런던에서 이런 사례에 딱 걸렸다. 학고재는 ‘물성 탐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고(故) 곽인식 작가의 1962년 작품을 걸려다 포기했다. 문화재청이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은 해외에 팔면 안 된다”며 반출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갤러리들은 200~300년 전 작품도 판매하는데, ‘고작’ 50년밖에 안 된 작품도 해외에 못 갖고 나가는 게 말이 되느냐. 이래 놓고 어떻게 ‘K미술’의 우수성을 알리겠느냐”고 하소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이 있다. 문화재보호법 60조는 제작된 지 50년이 지난 미술품은 문화재청 허가 없이 해외 반출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올해 기준으로 1973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은 문화재청 심사 절차를 밟아야만 해외에 나갈 수 있다. 심사 과정에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면 ‘일반동산문화재’로 분류돼 외국 판매가 금지된다.

일반동산문화재는 보물·국보 등 ‘지정문화재’와 달리 국가가 지정하지 않은 ‘비지정문화재’다. 회화, 조각, 고서(古書), 공예품 등 사람이 들고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이 대상이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미술관·박물관 등 전시를 위한 일시적 반출은 가능하지만, 해외 아트페어에 출품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규정이 ‘K미술 세계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미술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과 수요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데, 정작 한국 대표 작품은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찬규 학고재 회장은 “프리즈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갤러리와 컬렉터가 모이는 자리”라며 “한국 대표 작가들을 글로벌 ‘큰손’과 세계적인 미술관 큐레이터에게 선보일 기회를 우리 스스로 내던진 셈”이라고 했다.

프리즈, 아트바젤 등 국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내 갤러리들이 ‘요즘 작가’들 위주로 부스를 꾸리는 것도 규제의 영향이 크다. 국내 갤러리 관계자는 “반출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리스크 탓에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어도 제작한 지 50년 지난 작품은 리스트에서 뺀다”며 “국보나 보물도 아닌 비지정문화재도 정부 심사를 받도록 한 건 지나치다”고 했다.

◆“보호 명분으로 韓 미술 발전 막아”

‘제작 50년’이라는 기준도 논란거리다. 똑같은 작가가 그렸어도 1974년 작품은 거래할 수 있고, 1973년 작품은 안 될 수 있다는 의미여서다. 미술계에서 “같은 작가의 같은 연작인데 1년 차이로 이렇게 갈리는 게 합리적이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런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 달라고 미술계가 요청한 지 10년도 더 됐지만, 그때마다 문화재청의 답은 “검토 중”이다.

미술계는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일정 가격 이하의 비지정문화재는 경매나 아트페어에서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도 국보·보물 등 지정문화재가 아니면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있다.

정준모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는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일제강점기 시절 문화재를 수탈당했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보호’라는 명분으로 한국 미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며 “한국 미술에 관심이 높아진 만큼 하루빨리 낡은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런던=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