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전 기계를 적극 받아들인 벤슨, 英 금속공예 꽃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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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새미의 공예의 탄생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미술공예운동은 디자인의 역사를 공부할 때 대부분의 경우 처음 장에 등장한다. 산업생산에 반대해 중세로 돌아가고자 했던, 수공과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사회주의 운동으로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의 영향으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에 의해 진행되었고, 유럽의 아르누보, 일본의 민예 운동까지 그 영향 아래에 있다고 보는 여러 연구 및 전시도 진행된 바 있다.
하지만 궁금해진다. 우리는 미술공예운동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수공으로 아름다운 사물을 만드는 데 큰 비용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꿈꾸던 이들의 실패한 시도라는 평가 이외에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미술공예운동은 책, 그래픽, 건축, 실내 장식, 정원 디자인 등 일상에 침투했던 일종의 문화이자 사회 현상이었다. 특히 영국의 중산층과 상류층을 위한 인테리어 디자인의 유행을 이끌었고, ‘정직’하고 단순한 형태로 나름의 이상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도 단행했다. 이는 정직한 디자인으로 구성된 생활환경이 그곳에 거주하는 이의 도덕적 품성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온갖 과거의 장식 양식을 선택적으로 차용하는 절충주의로 인해 삶의 공간은 지나치게 장식적이었는데,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단순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금속 및 은공예 분야에서 기술적인 면과 미적인 면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다.
애쉬비는 낭만적이게도 이상주의자였고, 특히 중세적인 디자인의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중세 유럽과 르네상스 시대의 금속공예 기법도 연구했다, 특히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이기도 했던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논문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그는 첼리니의 논문 영문본을 자신의 출판사를 통해 1898년 출판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로스트 왁스(lost wax) 기술을 활용한 정밀 주조 기법에 관한 내용이 있었고, 애쉬비는 자신의 길드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이러한 기법을 19세기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독려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세기 전환기에 애쉬비의 사업은 팽창했다. 그는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교육을 통해 직인들의 잠재력을 깨워내기 위해 1888년 수공예 길드 및 학교를 설립했다. 금속 가공을 전문으로 했던 이 조직은 18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은식기를 디자인하고 생산했다. 애쉬비는 거울같이 광을 낸 납작하고 둥근 망치로 금속 표면을 균일하게 다듬는 과정을 통해 금속의 표면 역시 거울 같은 광택으로 마감하는 동시에 수공의 느낌도 낼 수 있는 플래니쉬(planishing) 기법을 선호했다. 기존의 은공예품이 온갖 역사적인 장식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망치 자국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단정한 표면은 수수한 수공예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애쉬비의 디자인은 과도한 장식을 지양하고 색과 형태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에서 근대적이었다. 예를 들어 디켄터의 유리 용기는 연한 초록색을 띠고 있는데 기물 최상단에 세팅된 유색 보석의 진녹색과 연동됨을 알 수 있다. 이 작은 진초록색 보석은 마치 디켄터의 맑은 초록색 유리의 색을 응축해 놓은 것 같다. 또한 손잡이 형태는 곡선적인 식물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유럽 대륙의 아르누보 양식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애쉬비의 디자인은 단순함과 우아함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그의 절제된 미학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현대 은공예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벤슨은 20대에 후기 고딕 양식 리바이벌을 주장했던 건축가 바실 챔프니스(Basil Champneys, 1842-1935)의 설계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챔프니스는 벤슨에게 미술공예 운동의 실행자, 윌리엄 모리스를 소개해 줬고, 모리스는 벤슨에게 금속 제품 생산을 위한 소규모 작업장을 설립하도록 격려했다. 벤슨은 이를 계기로 사업을 설립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리스와는 달리 기계 생산의 잠재력을 완전히 수용하는 방향으로, 독점 제품도 디자인했다. 아트 워커스 길드(Art Workers' Guild)의 창립 회원이기도 했던 벤슨은 적동, 황동, 전기도금 및 은을 사용하여 석유 기름등 및 전등의 부속품, 그리고 가정용품을 제조하여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02년 벤슨이 디자인하고 벤슨 社(WAS Benson and Co. Ltd)에서 제조했던 전등을 보면 조명의 에너지 원이 기름에서 전기로 변함에 따라 과도기적 노력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벤슨은 1896년 모리스 사망 후, 모리스 회사의 전무이사가 되었으며, 회사를 위해 가구와 벽지도 디자인했다.
그런데 리버티는 영국 및 유럽의 다른 아르누보 갤러리와 달리 제조비용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제품가격이 상승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다. 예를 들어 손으로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외관은 미술공예 스타일로 집을 꾸미려는 고객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하지만 이 제품은 실제로는 기계적으로 찍어낸 다음 체이싱 부분을 손으로 마무리한 것으로 제조 비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한 대안적 방법으로 생산된 제품이었다. 이것이 지그프리트 빙(Siegfried Bing, 1838-1905)이 파리에 설립했던 그 유명했던 라 메종 아르누보(La Maison de l'Art Nouveau)와 같은 소매점에서 판매했던 독창적이고 값비싼 아르누보 오브제와의 결정적 차이점이었다.
또한 리버티에서는 개별 디자인을 누가 디자인했는지 밝히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연구가 진행되며 디자이너의 신원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스무 명 남짓 했던 리버티의 은공예 스튜디오 디자이너 중 1898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던 아치볼드 녹스(Archibald Knox, 1864-1933)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1899년, 녹스는 리버티를 위해 은제품이었던 '킴릭(Cymric)'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던 백랍(白鑞, pewter)으로 만든 '투드릭(Tudric)' 제품군과 같은 새로운 셀틱(Celtic) 디자인 작업에 착수했다.
이 제품은 리버티 社의 가장 인기 있는 제품 중 하나가 되었다. 녹스는 이 패턴을 수많은 은공예 제품과 주석 제품에 적용해 소위 리버티 스타일의 주요한 맥락을 형성했다. 이는 녹스가 젊은 시절 켈트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리버티 카탈로그에는 "이 제품의 특징은 디자인 처리 문제에서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특히 킴릭 및 투드릭 제품군은 영국적인 근대 양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고, 또한 대중적이고, 유용하며, 미적인 좋은 취향의 물건을 생산한다는 리버티의 이념과도 일치했다. 정리하면 애쉬비는 큰 틀에서 본다면 실패한 계승자였다. 아름다운 디자인을 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력의 후반기인 1902년 길드 조직을 이끌고 시골로 이주했고, 그들이 만든 아름답고 우아한 제품을 소비해 줄 이들을 찾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미술공예운동의 모든 계승자들이 애쉬비처럼 산업자본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찾아 도시를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제조 비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고,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벤슨은 자신의 제조사에 기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그리고 녹스는 리버티 社의 대중적 전략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더욱더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사물을 제조하기 위해 기여했다. 결국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미술공예운동 금속공예의 맥락은 아르누보 그리고 모더니즘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궁금해진다. 우리는 미술공예운동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수공으로 아름다운 사물을 만드는 데 큰 비용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꿈꾸던 이들의 실패한 시도라는 평가 이외에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미술공예운동은 책, 그래픽, 건축, 실내 장식, 정원 디자인 등 일상에 침투했던 일종의 문화이자 사회 현상이었다. 특히 영국의 중산층과 상류층을 위한 인테리어 디자인의 유행을 이끌었고, ‘정직’하고 단순한 형태로 나름의 이상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도 단행했다. 이는 정직한 디자인으로 구성된 생활환경이 그곳에 거주하는 이의 도덕적 품성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온갖 과거의 장식 양식을 선택적으로 차용하는 절충주의로 인해 삶의 공간은 지나치게 장식적이었는데,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단순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금속 및 은공예 분야에서 기술적인 면과 미적인 면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다.
참조에서 창조로: C. R. 애쉬비와 수공예 길드
만약 누군가가 모리스의 계승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C. R. 애쉬비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렇다. 애쉬비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가구를 디자인했고, 실내를 장식했으며, 금속기물과 은공예품, 그리고 장신구도 디자인했고, 출판사 애섹스 하우스 프레스(Essex House Press)와 수공예 길드도 운영했다. 그중에서도 미적으로 뛰어나 미술공예운동의 금속공예 대표작으로 자주 등장하는 디캔터가 바로 애쉬비의 디자인이다.애쉬비는 낭만적이게도 이상주의자였고, 특히 중세적인 디자인의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중세 유럽과 르네상스 시대의 금속공예 기법도 연구했다, 특히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이기도 했던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논문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그는 첼리니의 논문 영문본을 자신의 출판사를 통해 1898년 출판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로스트 왁스(lost wax) 기술을 활용한 정밀 주조 기법에 관한 내용이 있었고, 애쉬비는 자신의 길드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이러한 기법을 19세기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독려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세기 전환기에 애쉬비의 사업은 팽창했다. 그는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교육을 통해 직인들의 잠재력을 깨워내기 위해 1888년 수공예 길드 및 학교를 설립했다. 금속 가공을 전문으로 했던 이 조직은 18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은식기를 디자인하고 생산했다. 애쉬비는 거울같이 광을 낸 납작하고 둥근 망치로 금속 표면을 균일하게 다듬는 과정을 통해 금속의 표면 역시 거울 같은 광택으로 마감하는 동시에 수공의 느낌도 낼 수 있는 플래니쉬(planishing) 기법을 선호했다. 기존의 은공예품이 온갖 역사적인 장식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망치 자국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단정한 표면은 수수한 수공예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애쉬비의 디자인은 과도한 장식을 지양하고 색과 형태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에서 근대적이었다. 예를 들어 디켄터의 유리 용기는 연한 초록색을 띠고 있는데 기물 최상단에 세팅된 유색 보석의 진녹색과 연동됨을 알 수 있다. 이 작은 진초록색 보석은 마치 디켄터의 맑은 초록색 유리의 색을 응축해 놓은 것 같다. 또한 손잡이 형태는 곡선적인 식물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유럽 대륙의 아르누보 양식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애쉬비의 디자인은 단순함과 우아함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그의 절제된 미학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현대 은공예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기계의 잠재력을 수용하다: W. A. S. 벤슨
미술공예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 장인은 일의 속성상 기계를 전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량 생산의 산업 공정 및 사회 구조를 반대했던 것뿐이지 그들의 고된 작업 과정을 수월하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거부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아서 스미스 벤슨(William Arthur Smith Benson, 1854-1924)은 기술 공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대표적인 경우이다. 벤슨은 잘 디자인된 금속 제품을 대중들이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의 가격으로 책정해 유통했다.벤슨은 20대에 후기 고딕 양식 리바이벌을 주장했던 건축가 바실 챔프니스(Basil Champneys, 1842-1935)의 설계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챔프니스는 벤슨에게 미술공예 운동의 실행자, 윌리엄 모리스를 소개해 줬고, 모리스는 벤슨에게 금속 제품 생산을 위한 소규모 작업장을 설립하도록 격려했다. 벤슨은 이를 계기로 사업을 설립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리스와는 달리 기계 생산의 잠재력을 완전히 수용하는 방향으로, 독점 제품도 디자인했다. 아트 워커스 길드(Art Workers' Guild)의 창립 회원이기도 했던 벤슨은 적동, 황동, 전기도금 및 은을 사용하여 석유 기름등 및 전등의 부속품, 그리고 가정용품을 제조하여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02년 벤슨이 디자인하고 벤슨 社(WAS Benson and Co. Ltd)에서 제조했던 전등을 보면 조명의 에너지 원이 기름에서 전기로 변함에 따라 과도기적 노력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벤슨은 1896년 모리스 사망 후, 모리스 회사의 전무이사가 되었으며, 회사를 위해 가구와 벽지도 디자인했다.
유통의 중요성 : 리버티 & Co. 와 아치볼드 녹스
리버티 社 (Liberty & Co)는 1875년 아서 라센비 리버티(Arthur Lasenby Liberty, 1843-1917)에 의해 설립되었다. 리버티 社는 일본 예술과 공예를 서양에 소개하고 대중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예술가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말 리버티는 새로운 스타일의 동의어가 되었고, 이탈리아에서는 아르누보가 런던 상점의 이름을 따서 스타일 리버티(Stile Liberty)로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리버티는 영국 및 유럽의 다른 아르누보 갤러리와 달리 제조비용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제품가격이 상승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다. 예를 들어 손으로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외관은 미술공예 스타일로 집을 꾸미려는 고객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하지만 이 제품은 실제로는 기계적으로 찍어낸 다음 체이싱 부분을 손으로 마무리한 것으로 제조 비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한 대안적 방법으로 생산된 제품이었다. 이것이 지그프리트 빙(Siegfried Bing, 1838-1905)이 파리에 설립했던 그 유명했던 라 메종 아르누보(La Maison de l'Art Nouveau)와 같은 소매점에서 판매했던 독창적이고 값비싼 아르누보 오브제와의 결정적 차이점이었다.
또한 리버티에서는 개별 디자인을 누가 디자인했는지 밝히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연구가 진행되며 디자이너의 신원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스무 명 남짓 했던 리버티의 은공예 스튜디오 디자이너 중 1898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던 아치볼드 녹스(Archibald Knox, 1864-1933)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1899년, 녹스는 리버티를 위해 은제품이었던 '킴릭(Cymric)'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던 백랍(白鑞, pewter)으로 만든 '투드릭(Tudric)' 제품군과 같은 새로운 셀틱(Celtic) 디자인 작업에 착수했다.
이 제품은 리버티 社의 가장 인기 있는 제품 중 하나가 되었다. 녹스는 이 패턴을 수많은 은공예 제품과 주석 제품에 적용해 소위 리버티 스타일의 주요한 맥락을 형성했다. 이는 녹스가 젊은 시절 켈트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리버티 카탈로그에는 "이 제품의 특징은 디자인 처리 문제에서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특히 킴릭 및 투드릭 제품군은 영국적인 근대 양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고, 또한 대중적이고, 유용하며, 미적인 좋은 취향의 물건을 생산한다는 리버티의 이념과도 일치했다. 정리하면 애쉬비는 큰 틀에서 본다면 실패한 계승자였다. 아름다운 디자인을 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력의 후반기인 1902년 길드 조직을 이끌고 시골로 이주했고, 그들이 만든 아름답고 우아한 제품을 소비해 줄 이들을 찾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미술공예운동의 모든 계승자들이 애쉬비처럼 산업자본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찾아 도시를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제조 비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고,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벤슨은 자신의 제조사에 기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그리고 녹스는 리버티 社의 대중적 전략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더욱더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사물을 제조하기 위해 기여했다. 결국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미술공예운동 금속공예의 맥락은 아르누보 그리고 모더니즘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