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삶이요, 삶은 산이로다… "당신은 정상에 오르고 싶은가" 영화 <여덟 개의 산>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
산은 왜 오르는가? 이 질문은 왜 사는가와 답변을 공유한다. 눈앞에 산이 있어서 오르는 거고,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등반과 삶의 본질은 그렇게 똑같다. 그래서 삶은 종종 등반으로 비유되고는 한다. 이탈리아 영화 <여덟 개의 산 Le otto montagne>(2022)은 산을 배경으로 한 삶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도시 출신의 피에트로(루카 마리넬리)와 산에서 내려와 본 적이 없는 브루노(알레산드로 보르기)다.
피에트로는 어려서부터 도시 토리노에 살면서 그라나의 산에서 몇 달을 지내는 삶을 반복해 왔다. 산의 유일한 아이는 브루노였는데 피에트로는 그와 친구가 되어 평생의 우정을 나눈다. 등반을 좋아하는 피에트로의 아버지 덕에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셋이 함께 산을 타기도 했다. 한 번은 빙하로 이뤄진 산의 꼭대기를 향했다가 피에트로가 고산병에 걸리면서 중도에 하산했던 일도 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피에트로에게 산은 경외의 대상이다. 산 타기가 누워서 떡 먹기와 같은 브루노에게 산은 제 집 같다. 환경은 성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산에 오르기를 즐기면서 한 편으로 두려운 마음이 있는 피에트로는 삶의 태도 또한 신중하다. 아버지처럼 일만 하는 사람이 되기 싫다는 결심만 섰을 뿐 방법을 몰라 브루노에게 종종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럴 때, 브루노 왈, 나는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그냥 시도해.
신중히 처리하거나, 과감하게 시도하거나, 누가 더 옳은 삶의 방식일까. <여덟 개의 산>은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파울로 코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어린 시절의 산’, ‘화해의 집’, ‘친구의 겨울’ 총 3부로 구성된 원작을 벨기에 출신의 펠릭스 반 그뢰닝엔과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공동 감독은 챕터의 구분 없이 하나로 연결된 이야기로, 일종의 대서사시처럼 완성했다.
“산에 있다는 것은 무자비하고 정직한 환경 속에서 당신 스스로와 대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제한 두 감독은 “왜 당신은 정상에 가려고 하는 것인가?”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연출에 임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 자체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깨닫기를, “그곳에 정답은 없고 우리 또한 여전히 정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의문 속에서 다시 내려갈 뿐이다.“
그렇다, 더 옳은 삶의 방식이란 없다. 삶에 임하는 각자의 태도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왜 사는지의 화두를 붙잡고 힘든 산을 오르는 것처럼 고민하고 부딪히고 좌절하고 다시 힘을 얻어 정상을 향해 나아가며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정상에 오르기는커녕 고민하고 부딪히고 좌절하고 다시 힘을 얻는 과정을 일평생 반복하다가 삶에서의 하산, 즉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보통이다. 운이 좋아 정상을 밟는다고 해도 이를 영원으로 유지하는 사람은 없다. 삶은 희로애락을 반복하는 운동이라서다. 이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고, 삶 그 자체다. <여덟 개의 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네팔에서 돌아온 피에트로가 브루노에게 경험을 공유하던 중 나온 말로, “세상엔 여덟 개의 산과 바다가 있대. 중심엔 이렇게 커다란 산이 있어. 수미산이지. 문제는 누가 더 많이 배울까?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여행한 자와 수미산에 오른 사람 중에 말야.”
여기서 전자는 피에트로이고, 후자는 브루노를 가리킨다. 세상은, 바다는, 특히 산은 이 둘을, 이들의 삶의 태도를 가르고 판단하는 대신 모두 헤아리고 품는다. <여덟 개의 산>이 피에트로와 브루노 간의 우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둘은 삶을 대하는, 산을 바라보는 각각의 태도와 시각이 다르다고 해서 거리를 두거나 하지 않고 친구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하고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인 양 공유하며 그들 자신이 산인 것처럼 서로를 향한 존중의 자세로 평생의 우정을 잃지 않았다.
4:3의 화면비를 채택하고 있는 <여덟 개의 산>은 답답하기보다 그 안에 속해 존중받는다는 따뜻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여전히 삶이 혼란한 피에트로는 산을 오르내리며 자신을, 세상을 찾아 헤매기를 반복할 것이다. 브루노는 산을 자신의 전부 삼아 벗어나는 일이 없을 테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독특하든 평범하든 산은 아무 말 없이 피에트로와 브루노를 모두 품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대들의 삶은 모두 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관련 리뷰) 안시욱 기자= 알프스에 펼쳐진 두 남성의 '브로맨스'…영화 '여덟 개의 산'
피에트로는 어려서부터 도시 토리노에 살면서 그라나의 산에서 몇 달을 지내는 삶을 반복해 왔다. 산의 유일한 아이는 브루노였는데 피에트로는 그와 친구가 되어 평생의 우정을 나눈다. 등반을 좋아하는 피에트로의 아버지 덕에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셋이 함께 산을 타기도 했다. 한 번은 빙하로 이뤄진 산의 꼭대기를 향했다가 피에트로가 고산병에 걸리면서 중도에 하산했던 일도 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피에트로에게 산은 경외의 대상이다. 산 타기가 누워서 떡 먹기와 같은 브루노에게 산은 제 집 같다. 환경은 성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산에 오르기를 즐기면서 한 편으로 두려운 마음이 있는 피에트로는 삶의 태도 또한 신중하다. 아버지처럼 일만 하는 사람이 되기 싫다는 결심만 섰을 뿐 방법을 몰라 브루노에게 종종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럴 때, 브루노 왈, 나는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그냥 시도해.
신중히 처리하거나, 과감하게 시도하거나, 누가 더 옳은 삶의 방식일까. <여덟 개의 산>은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파울로 코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어린 시절의 산’, ‘화해의 집’, ‘친구의 겨울’ 총 3부로 구성된 원작을 벨기에 출신의 펠릭스 반 그뢰닝엔과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공동 감독은 챕터의 구분 없이 하나로 연결된 이야기로, 일종의 대서사시처럼 완성했다.
“산에 있다는 것은 무자비하고 정직한 환경 속에서 당신 스스로와 대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제한 두 감독은 “왜 당신은 정상에 가려고 하는 것인가?”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연출에 임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 자체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깨닫기를, “그곳에 정답은 없고 우리 또한 여전히 정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의문 속에서 다시 내려갈 뿐이다.“
그렇다, 더 옳은 삶의 방식이란 없다. 삶에 임하는 각자의 태도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왜 사는지의 화두를 붙잡고 힘든 산을 오르는 것처럼 고민하고 부딪히고 좌절하고 다시 힘을 얻어 정상을 향해 나아가며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정상에 오르기는커녕 고민하고 부딪히고 좌절하고 다시 힘을 얻는 과정을 일평생 반복하다가 삶에서의 하산, 즉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보통이다. 운이 좋아 정상을 밟는다고 해도 이를 영원으로 유지하는 사람은 없다. 삶은 희로애락을 반복하는 운동이라서다. 이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고, 삶 그 자체다. <여덟 개의 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네팔에서 돌아온 피에트로가 브루노에게 경험을 공유하던 중 나온 말로, “세상엔 여덟 개의 산과 바다가 있대. 중심엔 이렇게 커다란 산이 있어. 수미산이지. 문제는 누가 더 많이 배울까?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여행한 자와 수미산에 오른 사람 중에 말야.”
여기서 전자는 피에트로이고, 후자는 브루노를 가리킨다. 세상은, 바다는, 특히 산은 이 둘을, 이들의 삶의 태도를 가르고 판단하는 대신 모두 헤아리고 품는다. <여덟 개의 산>이 피에트로와 브루노 간의 우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둘은 삶을 대하는, 산을 바라보는 각각의 태도와 시각이 다르다고 해서 거리를 두거나 하지 않고 친구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하고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인 양 공유하며 그들 자신이 산인 것처럼 서로를 향한 존중의 자세로 평생의 우정을 잃지 않았다.
4:3의 화면비를 채택하고 있는 <여덟 개의 산>은 답답하기보다 그 안에 속해 존중받는다는 따뜻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여전히 삶이 혼란한 피에트로는 산을 오르내리며 자신을, 세상을 찾아 헤매기를 반복할 것이다. 브루노는 산을 자신의 전부 삼아 벗어나는 일이 없을 테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독특하든 평범하든 산은 아무 말 없이 피에트로와 브루노를 모두 품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대들의 삶은 모두 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관련 리뷰) 안시욱 기자= 알프스에 펼쳐진 두 남성의 '브로맨스'…영화 '여덟 개의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