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맨 공연사진 / 국립정동극장 제공
쇼맨 공연사진 / 국립정동극장 제공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에는 이야기가 있다. 모든 뮤지컬에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쇼맨>에서 ‘이야기’는 작품의 모든 것이다.

<쇼맨>은 수아가 네불라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에게 자신의 해석을 더하여 다시 이야기해주는 작품이다. 수아가 네불라의 이야기를 접하기 전후도 극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수아는 네불라의 이야기를 듣는 한 사람으로서, <쇼맨>이 네불라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유를 곱씹게 만드는 이유와 같다고. 어떤 점에서 수아는 한 명의 관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수아는 이런 관찰자적 위치 때문에 <쇼맨>에서 다소 후경화되는 면이 있다. 공연 내내 거의 온 스테이지 상태로 있지만 극은 수아의 서사보다 그녀의 반응을 더 중시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쇼맨>의 극적 현재는 수아의 현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아는 네불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낼 수 있도록 상황과 조건을 만드는 존재다.

그리고 관객은 그 과정에서 수아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수아는 왜 생면부지 네불라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던 것일까. 수아의 현재에 네불라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리는 수아가 누구인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수아는 9살 때 미국 뉴저지로 입양된 한국인 여자 아이였다. 처음 누워보는 침대와 만지기도 아까운 인형들은 수아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수아는 ‘대체재’였다. 입양된 집에는 수아보다 2살 어린 장애인 여동생 제인이 있었다. 양부모는 수아에게 ‘굿 걸(good girl)’이라 부르며, 본인들의 부재 시 절대로 제인 옆을 떠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수아를 평생 값싸게 부릴 수 있는 보모로 입양한 것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수아는 ‘착한 아이 되기’에 순응하며 한국 음식까지 멀리 했다. 그 집에서 자신만 ‘다른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한 아이로 살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던 수아가 집을 나오는 사건이 벌어진다. 어느 날, 20대가 된 수아는 친구의 집에서 자신의 생일파티를 하다가 제인 혼자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금방 집으로 돌아온다. 예감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라이터를 갖고 놀던 제인이 실수로 불을 내 집안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현장을 수습하느라 수아 자신도 다쳤지만 양부모는 수아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대체재로서 수아의 ‘기능’에만 신경을 쓴다. 이로써 수아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고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이후 수아는 독립해 살기 위해 ‘굿 데이’ 마트에 취직한다. 그녀가 하는 일은 진열대에 있는 과일의 상품성에 차이가 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벌레 먹은 것, 썩은 것을 골라내고 다시 새 것으로 채워 넣는 일을 하는 수아는 매일매일 완벽하게 자기 일을 수행한다. 수아는 거의 맹목적으로 일을 한다. 잠시 공석이 된 매니저 자리를 끝내 차지하려는 욕망과 진짜 미국인으로 살고 싶은 욕망은 그녀를 맹목적으로 만든다. 수아는 날이 갈수록 돈과 권력에 민감해져만 갔다.
쇼맨 공연사진 / 국립정동극장 제공
쇼맨 공연사진 / 국립정동극장 제공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도 딱 한 가지 취미가 있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들고 유원지에 나가 사진을 찍으며 뜨내기들 사이에 파묻히기를 좋아했다. 유원지에서 수아는 매번 같은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빤히 쳐다보곤 했다. 부모를 놓쳐 미아가 된 아이가 울면 자기도 따라 울고, 부모를 찾으면 같이 웃기도 하면서. 과거의 기억을 지우며 어떤 틀에 맞춰 자신의 성역을 구축하던 수아는 사실 누구보다도 외로웠다.

유원지에서 수아가 네불라에게 했던 첫 번째 이야기는 자신은 ‘프로’라는 거짓말이었다. 수아는 원숭이 코스튬을 입은 70대 할아버지 네불라가 자신에게 팁을 요구하는 줄 알았다. 거짓말 이면에는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네불라는 수아에게 그의 사진을 찍어 달라며 프로 사진작가에게 어울리는 수고비를 제안한다. 수아는 이런 네불라를 호구, 느끼하고 까다로운 고객이라 생각한다. 네불라의 과거를 찍는 작업이 시작된 이후에는 그를 상식적인 관종, 징그러운 변태라고 생각한다. 네불라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과거가 희대의 살인마 독재자인 미토스의 대역을 맡았던 시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작업이 끝난 후에는 그를 비겁하고 구질구질한 바보라 생각한다. 그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도 부정하기 싫은 양가감정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네불라는 작업이 끝난 후 수아에게 그가 누구인지 판단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제 세상에서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수아였다. 하지만 수아는 대답 대신 네불라의 질문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수아는 굿 데이 마트에서도 대체재였다. 매니저 대행이 아니라 진짜 매니저가 되기 위해 완벽해지려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이미 수아의 상상 속에서는 미토스와 똑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매니저 자체였다.

그러나 생일을 며칠 앞둔 수아는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가 여전히 자신의 현재임을 깨닫는다. 수아는 알게 된다. 인생은 딱 자신의 키만큼 깊은 바다라는 사실을. 인생은 그 안에서 간신히 숨만 쉬며 흘러가는 것임을. 그래서 수아는 삶의 모든 국면을 끌어안는다. 수아는 네불라의 그 모든 얼굴이 네불라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수아의 대답에 네불라가 행복해했듯, 아마도 수아 역시 조금은 편해질 것이다. 제인을 만나러 간 수아의 웃는 얼굴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이다. <쇼맨>이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려 했던 이유는 수아의 ‘웃는 얼굴’, 여기에 있다.
쇼맨 공연사진 / 국립정동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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