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문학으로 가을 밤을 새워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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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
<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국문학과에 입학했을 때, 자기소개 자리에서 한 선배가 내게 물었다. 여기서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나는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까지 읽어본 문학책이라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죄와 벌> 정도였을까. 시집 한 권을 통으로 읽어본 적도 없어서 도서관에서 무얼 읽고 무슨 생각을 하며 보내고 싶은지 자각조차 없었던 내 대답에 그 선배는 "참 좋은 생각"이라며 같이 해보자고 했었다.
이 시대의 한국문학을 읽기 시작한 건 그후의 일이었다. 선배들이 짜놓은 커리큘럼에 따라 손에 쥐었던 김사과의 <천국에서>와 장강명의 <표백>, 그리고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 등은 내게 개안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무언가 개운치 않지만 겉으로 보기엔 이미 완성된 세계 같은 이곳에서 어떤 꿈을 지녀야 할지도 모르겠는 그런 모종의 박탈감이 섞인 허망함, 그렇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해보고 싶은 서툴고 순박한 의지를 그 안에서 발견해 내 것으로 이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해 발전시켜 나갔던 한국문학은 참으로 재밌었다. 얼핏 들어본 이름이라도 한 권도 읽지 못한 채로 졸업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이어진 김연수, 김애란, 박민규, 이장욱, 송경동, 김승일, 백은선, 허윤진, 조연호, 황정은, 정세랑, 김숨, 배수아, 박솔뫼…. 그러나 2010년대의 한국문학을 읽는다는 건 국문학과에서도 드문 일이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홀로 즐거워했다. 그 아쉬움이 여전히 턱끝에 달려 있어, 지금의 한국문학을 함께 읽고 말하기 위해 출판사에 들어간 것 같다. “오후에 방에서 책을 정리하면서 레예스를 생각했다. 레예스나 레예스가 좋아하던 이들을 읽으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너무 쉬운 일이다.”
_<야만스러운 탐정들 1>, 162~163쪽.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그 시절 나의 간절한 소망이 그대로 상연되고 있는 소설이다. 홀로 책을 읽고 시를 쓰던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에게 “내장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이 당도한다. “물론 나는 수락했다. 통과의례는 없었다. 그게 더 낫다.” 통과의례란 건 잘 모르는 사이에서나 부득이 필요한 것으로, 동지가 될 사람은 딱 보면 아는 법이다.
내장 사실주의의 핵심은 두 시인으로,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다. 존. F. 케네디 살인범인 리 하비 오즈월드 이름으로 시 잡지를 창간했지만 그 잡지를 이어가기엔 뒷배도 돈도 가진 것 하나 없는 그들은 신출귀몰하면서 마리화나를 몰래 파는 것 같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수하는 내장 사실주의란 무엇일까. 옥타비오 파스의 형이상학적 시도, 파블로 네루다의 사회 참여적 시도 아닌 오직 문학을 위한 문학. 하지만 반골 그 자체인 그들의 문학이 고고하게 안으로 파고드는 뻣뻣한 문학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모든 규범과 통념에 저항하는 가장 전위적인 참여였음은 자명하다.
그들이 모여 허구한 날 하는 이야기의 주제와 소재는 오늘날의 문학이다. 어떤 시인이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고 어떤 시인이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순 시시껄렁에 불과한지, 그들은 실존 작가들을 대상으로 무한한 ‘실명 토크’를 이어간다. 이 엄청난 이름의 홍수 앞에서 압도되면서 드는 생각은, 만약 내가 그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었을까? 볼라뇨가 친구와 웃고 즐기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는 것처럼, 내가 가진 이름들을 덧대어보며 기꺼워해본다.
당대의 칠레를 둘러싼 온갖 정치가, 지식인, 작가들을 저격하는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는 동안엔 너무 신랄해서 늑골 안쪽이 다 미어지는 심정이었다. 그처럼 <야만스러운 탐정들> 또한 서늘한 비꼼과 비판의식이 깊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보다도 시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어디서든 항상 썼던 문학 청년들의 간절한 진심과, 그로 인해 문학에 오롯이 투신한 삶이 과연 어떤 모양을 이루어나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로 드물다. 라틴 아메리카의 시대상을 지극히 핍진하게 담아내면서도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21세기의 한국에서도 나 또한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라고 자진 납세하게 하는 볼라뇨의 재능은 귀중한 덤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내게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내가 발견하고 소중히 담아온 나의 국문학과 친구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한국문학을 두고 그토록 격렬하게 새웠던 밤이 몇 년이나 이어졌는지 떠올리면 추워지는 계절에도 마음 한편이 따듯해진다.
이제 그 치열한 문학의 밤은 더이상 찾아오지 않지만, 문학과 삶은 별개가 아니라는 걸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알려주었듯이 친구들과 나는 문학을 말하지 않고도 문학을 살아간다. 서로의 삶을 비평함으로써. 이제 이쯤 되면 더 이상 싸울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10년 전처럼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치고받기도 하는 친구들.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난 우애만큼 서로를 끼워맞추기보다 있는 그대로 끼워지기를 택하고, 그만큼 두터워진 동지애로 결속된. 얘들아, 정말 격하게 아낀다. 그래도 내가 맞았어. 김사과는 최고야. 알겠어?
있잖아, 여전히 너희들은 내게 아르투로 벨라노이며 울리세스 리마지만 나는 너희가 어떤 문학을 써낼지 아직도 궁금하다. 나는 욕심이 많은 편집자. 언제든 잘 들여다볼 준비가 되어 있어. 다시 문학의 밤을 밤새 벌여볼 바람도.
이 시대의 한국문학을 읽기 시작한 건 그후의 일이었다. 선배들이 짜놓은 커리큘럼에 따라 손에 쥐었던 김사과의 <천국에서>와 장강명의 <표백>, 그리고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 등은 내게 개안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무언가 개운치 않지만 겉으로 보기엔 이미 완성된 세계 같은 이곳에서 어떤 꿈을 지녀야 할지도 모르겠는 그런 모종의 박탈감이 섞인 허망함, 그렇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해보고 싶은 서툴고 순박한 의지를 그 안에서 발견해 내 것으로 이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해 발전시켜 나갔던 한국문학은 참으로 재밌었다. 얼핏 들어본 이름이라도 한 권도 읽지 못한 채로 졸업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이어진 김연수, 김애란, 박민규, 이장욱, 송경동, 김승일, 백은선, 허윤진, 조연호, 황정은, 정세랑, 김숨, 배수아, 박솔뫼…. 그러나 2010년대의 한국문학을 읽는다는 건 국문학과에서도 드문 일이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홀로 즐거워했다. 그 아쉬움이 여전히 턱끝에 달려 있어, 지금의 한국문학을 함께 읽고 말하기 위해 출판사에 들어간 것 같다. “오후에 방에서 책을 정리하면서 레예스를 생각했다. 레예스나 레예스가 좋아하던 이들을 읽으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너무 쉬운 일이다.”
_<야만스러운 탐정들 1>, 162~163쪽.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그 시절 나의 간절한 소망이 그대로 상연되고 있는 소설이다. 홀로 책을 읽고 시를 쓰던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에게 “내장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이 당도한다. “물론 나는 수락했다. 통과의례는 없었다. 그게 더 낫다.” 통과의례란 건 잘 모르는 사이에서나 부득이 필요한 것으로, 동지가 될 사람은 딱 보면 아는 법이다.
내장 사실주의의 핵심은 두 시인으로,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다. 존. F. 케네디 살인범인 리 하비 오즈월드 이름으로 시 잡지를 창간했지만 그 잡지를 이어가기엔 뒷배도 돈도 가진 것 하나 없는 그들은 신출귀몰하면서 마리화나를 몰래 파는 것 같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수하는 내장 사실주의란 무엇일까. 옥타비오 파스의 형이상학적 시도, 파블로 네루다의 사회 참여적 시도 아닌 오직 문학을 위한 문학. 하지만 반골 그 자체인 그들의 문학이 고고하게 안으로 파고드는 뻣뻣한 문학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모든 규범과 통념에 저항하는 가장 전위적인 참여였음은 자명하다.
그들이 모여 허구한 날 하는 이야기의 주제와 소재는 오늘날의 문학이다. 어떤 시인이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고 어떤 시인이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순 시시껄렁에 불과한지, 그들은 실존 작가들을 대상으로 무한한 ‘실명 토크’를 이어간다. 이 엄청난 이름의 홍수 앞에서 압도되면서 드는 생각은, 만약 내가 그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었을까? 볼라뇨가 친구와 웃고 즐기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는 것처럼, 내가 가진 이름들을 덧대어보며 기꺼워해본다.
당대의 칠레를 둘러싼 온갖 정치가, 지식인, 작가들을 저격하는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는 동안엔 너무 신랄해서 늑골 안쪽이 다 미어지는 심정이었다. 그처럼 <야만스러운 탐정들> 또한 서늘한 비꼼과 비판의식이 깊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보다도 시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어디서든 항상 썼던 문학 청년들의 간절한 진심과, 그로 인해 문학에 오롯이 투신한 삶이 과연 어떤 모양을 이루어나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로 드물다. 라틴 아메리카의 시대상을 지극히 핍진하게 담아내면서도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21세기의 한국에서도 나 또한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라고 자진 납세하게 하는 볼라뇨의 재능은 귀중한 덤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내게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내가 발견하고 소중히 담아온 나의 국문학과 친구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한국문학을 두고 그토록 격렬하게 새웠던 밤이 몇 년이나 이어졌는지 떠올리면 추워지는 계절에도 마음 한편이 따듯해진다.
이제 그 치열한 문학의 밤은 더이상 찾아오지 않지만, 문학과 삶은 별개가 아니라는 걸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알려주었듯이 친구들과 나는 문학을 말하지 않고도 문학을 살아간다. 서로의 삶을 비평함으로써. 이제 이쯤 되면 더 이상 싸울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10년 전처럼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치고받기도 하는 친구들.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난 우애만큼 서로를 끼워맞추기보다 있는 그대로 끼워지기를 택하고, 그만큼 두터워진 동지애로 결속된. 얘들아, 정말 격하게 아낀다. 그래도 내가 맞았어. 김사과는 최고야. 알겠어?
있잖아, 여전히 너희들은 내게 아르투로 벨라노이며 울리세스 리마지만 나는 너희가 어떤 문학을 써낼지 아직도 궁금하다. 나는 욕심이 많은 편집자. 언제든 잘 들여다볼 준비가 되어 있어. 다시 문학의 밤을 밤새 벌여볼 바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