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이야기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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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인류는 이야기의 올실과 날실로 짠 세상을 거치며 더 똑똑해졌다. 인류가 이야기의 젖을 물고 성장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고 인류의 온갖 기억을 저장한 보물창고다. 이야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세상도 존재할 수 없을 테다.
이야기는 인류를 키운 위대한 어머니다. 여행자들이 별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던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성서, 장자, 삼국사기, 천일야화들은 온갖 이야기로 가득 찬 집약체다. 그 많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해주던 이야기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집안 어른들 때문에 헤어진 애인과 강물에 빠져 죽은 청년의 슬픈 이야기(아주머니 처녀 적 동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엄마가 없는 사이 늑대에게 잡아먹힌 아이들 이야기(나중에 돌아온 엄마가 늑대 배를 갈라 아이들을 구한다!), 장에서 돌아오던 아저씨가 밤새 도깨비와 싸운 이야기(날이 밝고 보니 도깨비는 오래된 빗자루였다!)들을 들려줬다.
그 아주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가실과 설씨녀’도 있다. 가실이라는 이웃 청년이 설씨녀의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전쟁에 나선다. 가실은 전쟁에서 돌아오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약조를 남기고 전장으로 향한다. 가실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전쟁이 끝난 한참 뒤에도 감감소식이다. 설씨녀의 아버지는 가실이 죽었다고 여기고 다른 곳과 설씨녀의 혼사를 약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혼식 당일에 가실이 돌아온다. 가실은 설씨녀와 약속의 증표로 나눈 반쪽 거울을 맞추고 설씨녀를 아내로 맞아 행복하게 살았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삼국사기>에서 발견하고 놀랐다.
처음 세상은 불안정해 보였다. 반고는 하늘이 무너질까 불안해서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었다. 반고의 몸이 점점 자라면서 하늘과 땅 사이가 벌어지게 되고, 1만8000년 동안 혼돈을 막은 반고가 대지에 누워 잠을 자다가 숨을 거둔다. 이때 반고가 흘린 체액은 강과 바다로 변하고, 뼈와 살은 산과 들과 언덕이 됐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며 초 단위로 쏟아지는 정보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삼켜버린다. 이야기들은 맥락이 없는 정보의 파편으로 흩어진다. 지금은 이야기는 없고 정보는 과잉으로 넘친다. 정보는 미디어로 퍼져나가고 주식시장과 정치의 장 안에서 활발하게 움직인다. 정보는 데이터로 쌓여 분석되지만 기억을 매개로 전승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정보를 클릭하고, 최신 정보를 검색하느라 개인 컴퓨터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정보에는 서사도 반전도 없다. 이야기는 긴 시간과 비밀을 품는다. 이야기가 머금은 서사로 인해 이야기는 늘 숙고와 경탄을 자아낸다. 삶은 그 자체로 이야기다. 정보는 시간이 점으로 스미면서 나타나는 최소한도의 이야기다. 정보 발생의 조건은 시간 빈곤이다. 시간의 지속성을 품지 못한 정보가 이야기를 대체하는 순간 삶도 파편화되면서 증발한다. 정보의 시대에는 데이터의 공유만 있을 뿐 이야기의 감동이나 향유의 시간은 없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낼 여유를 확보할 수 없다. 모든 게 바쁘게 돌아가는 탓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만들어진 정보는 광속으로 사라진다. 정보의 수명은 그만큼 짧다.
정보는 대량 생산돼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친다. 이것들은 알 필요도 없는 정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옛이야기와 신화들은 긴 시간의 지속성을 머금고 나타난다. 그런 긴 시간을 품은 이야기를 들으며 까무룩 잠에 빠져드는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외할머니나 이웃 아주머니를 갖지 못한 채로 자라난다. 설화와 이야기가 없는 시대에 태어나 정보의 지배에 예속된 채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제 경험을 이야기로 빚는 능력을 키울 수가 없다.
어쩌면 경험을 이야기로 빚고 이것이 서사로 진화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경험의 빈곤, 혹은 경험의 파편화일 것이다. 인류의 불행은 분명 이야기를 정보로 대체한 시대와 연관되는지도 모른다. 다들 정보를 업데이트하느라 눈과 손이 바쁜 이 순간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우리는 당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인류를 키운 위대한 어머니다. 여행자들이 별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던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성서, 장자, 삼국사기, 천일야화들은 온갖 이야기로 가득 찬 집약체다. 그 많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해주던 이야기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보물창고
나는 이야기를 유난히도 탐하는 아이였다. 외할머니는 나를 무릎에 뉜 채로 옛이야기를 들려줬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외할머니는 농사일에 지쳐 저녁밥 먹고 나면 이내 코를 골고 주무셨다. 나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이야기를 졸랐다. 내가 이야기를 조를 때마다 그 아주머니는 이야깃주머니를 풀어놨다.집안 어른들 때문에 헤어진 애인과 강물에 빠져 죽은 청년의 슬픈 이야기(아주머니 처녀 적 동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엄마가 없는 사이 늑대에게 잡아먹힌 아이들 이야기(나중에 돌아온 엄마가 늑대 배를 갈라 아이들을 구한다!), 장에서 돌아오던 아저씨가 밤새 도깨비와 싸운 이야기(날이 밝고 보니 도깨비는 오래된 빗자루였다!)들을 들려줬다.
그 아주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가실과 설씨녀’도 있다. 가실이라는 이웃 청년이 설씨녀의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전쟁에 나선다. 가실은 전쟁에서 돌아오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약조를 남기고 전장으로 향한다. 가실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전쟁이 끝난 한참 뒤에도 감감소식이다. 설씨녀의 아버지는 가실이 죽었다고 여기고 다른 곳과 설씨녀의 혼사를 약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혼식 당일에 가실이 돌아온다. 가실은 설씨녀와 약속의 증표로 나눈 반쪽 거울을 맞추고 설씨녀를 아내로 맞아 행복하게 살았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삼국사기>에서 발견하고 놀랐다.
이야기와 인류의 역사는 하나다
천지개벽, 인류의 탄생, 세상을 휩쓴 홍수, 건국 신화들과 더불어 인류의 역사가 시작한다. 이야기의 탄생과 인류의 역사는 동일한 궤를 이룬다. 반고는 고대 동아시아의 신화에 나오는 창세신이다. 반고는 혼돈의 신인 제강이 죽자 나타나 우주 만물을 빚는다. 우주가 알 속에 혼돈으로 존재할 때 반고는 그 안에서 잉태됐다. 반고는 도끼로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찰나 알 속에 있던 것들이 세상에 흩어지며 하늘과 땅이 생겨난다.처음 세상은 불안정해 보였다. 반고는 하늘이 무너질까 불안해서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었다. 반고의 몸이 점점 자라면서 하늘과 땅 사이가 벌어지게 되고, 1만8000년 동안 혼돈을 막은 반고가 대지에 누워 잠을 자다가 숨을 거둔다. 이때 반고가 흘린 체액은 강과 바다로 변하고, 뼈와 살은 산과 들과 언덕이 됐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며 초 단위로 쏟아지는 정보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삼켜버린다. 이야기들은 맥락이 없는 정보의 파편으로 흩어진다. 지금은 이야기는 없고 정보는 과잉으로 넘친다. 정보는 미디어로 퍼져나가고 주식시장과 정치의 장 안에서 활발하게 움직인다. 정보는 데이터로 쌓여 분석되지만 기억을 매개로 전승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정보를 클릭하고, 최신 정보를 검색하느라 개인 컴퓨터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정보에는 서사도 반전도 없다. 이야기는 긴 시간과 비밀을 품는다. 이야기가 머금은 서사로 인해 이야기는 늘 숙고와 경탄을 자아낸다. 삶은 그 자체로 이야기다. 정보는 시간이 점으로 스미면서 나타나는 최소한도의 이야기다. 정보 발생의 조건은 시간 빈곤이다. 시간의 지속성을 품지 못한 정보가 이야기를 대체하는 순간 삶도 파편화되면서 증발한다. 정보의 시대에는 데이터의 공유만 있을 뿐 이야기의 감동이나 향유의 시간은 없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낼 여유를 확보할 수 없다. 모든 게 바쁘게 돌아가는 탓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만들어진 정보는 광속으로 사라진다. 정보의 수명은 그만큼 짧다.
정보가 이야기를 대체하면…
정보가 납작하다면 이야기에는 굴곡과 두께가 있다. 신화, 민담, 기담, 무용담은 정보의 단편성, 즉자성, 일회성을 뛰어넘는 깊이를 담은 이야기로 이뤄진다. 이야기에는 리듬과 서사적 진폭이 있으며 세계를 흔들고 뒤엎을 만한 전언이 담긴다. 정보에는 시간을 머금은 의미가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런 탓에 정보는 밋밋하고 투명하다. 그 밋밋함과 투명함이 세계를 탈신비화한다. 반면 이야기가 품은 불투명성과 신비는 우리 상상력을 풍부하게 자극한다. 정보 체제의 지배는 전혀 강압적이지 않지만 우리는 정보의 예속에 저항하지 못한 채 끌려간다. 그 결과 이야기들이 사라진 사막에서 서사적 빈곤을 겪는다.정보는 대량 생산돼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친다. 이것들은 알 필요도 없는 정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옛이야기와 신화들은 긴 시간의 지속성을 머금고 나타난다. 그런 긴 시간을 품은 이야기를 들으며 까무룩 잠에 빠져드는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외할머니나 이웃 아주머니를 갖지 못한 채로 자라난다. 설화와 이야기가 없는 시대에 태어나 정보의 지배에 예속된 채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제 경험을 이야기로 빚는 능력을 키울 수가 없다.
어쩌면 경험을 이야기로 빚고 이것이 서사로 진화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경험의 빈곤, 혹은 경험의 파편화일 것이다. 인류의 불행은 분명 이야기를 정보로 대체한 시대와 연관되는지도 모른다. 다들 정보를 업데이트하느라 눈과 손이 바쁜 이 순간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우리는 당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