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증권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여의도 증권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화운용과 미래에셋운용에서 먼저 나온 상품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사실 생각은 저희가 훨씬 먼저 했는데 '인터셉트'(가로채기) 당한 거죠. 때문에 더욱 절치부심으로 (차별화 지점을) 고민했습니다. 조금 늦게 내는 대신에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상품을 내야겠단 생각을 한 것이죠."

최근 서울 여의도동 한 호텔에서 진행된 한국투자신탁운용 상장지수펀드(ETF) 기자간담회에서 한 임원이 일본 반도체 ETF 출시 배경을 설명하다가 뱉은 말입니다. 농담조로 말한 것이지만 '가로채기'란 단어 선택에 뼈가 있습니다. 여전히 '최초 ETF' 경쟁에 시달리는 운용사의 힘겨운 속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반도체 ETF를 두고도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국내 상장된 ETF들 중 일본시장에 투자하는 지수형 상품은 있었어도 특정 섹터를 집은 테마형 상품은 없었습니다. 때문에 일본 테마형 ETF를 우선 출시하려는 운용사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힘겨루기가 벌어진 겁니다. '카피캣 상장' 논란이 계속되는 마당에 상장 심사 권한을 가진 한국거래소로서도 어느 장단에 맞춰줄지 고민일 겁니다.

결국 이번 일은 한화운용이 가장 먼저 상품을 내고 미래에셋운용은 약 3주 뒤 출시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습니다. 세 번째 순서인 한투운용은 이제 상품을 내놓았고요. 일종의 관례처럼 여겨지던 '동시 상장'(비슷한 콘셉트의 상품은 같은 날 상장)의 사례를 최근엔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런 피말리는 최초 경쟁 때문입니다.

ETF 시장이 다른 투자상품 대비 역사가 짧은 탓에 운용사 ETF 담당들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입니다. 서로 업계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정보 입수 능력을 견제구로 쓰기도 합니다. 상품 콘셉트가 겹치지 않게끔 업계를 수소문해 경쟁사의 상품 준비소식을 미리 전해 듣는 식입니다. 늘 레이더를 켜두다 보니 한 운용사가 다른 운용사의 야심작을 베껴서 비슷한 시기 내놓는 방식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 상품 개발에 착수했는가'를 따질 길이 없어 당하는 운용사들로선 심증만 있을 뿐 변변한 항의도 못하는 처지죠.

반대의 억울한 경우도 생깁니다. 회사마다 ETF에 우선순위를 매겨 내놓다보니 먼저 고안했다고 하더라도 타사보다 늦게 출시할 수 있는데 '베끼기' 지적을 받는단 것입니다. 과거 'BBIG'(배터리·바이오·인터넷·게임) 상품처럼 새 개념을 만든 것도 아니고 대부분 해외시장에 있는 것을 국내로 들이는 것인데, 이를 두고 '네 것 내 것'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운용사들 간 전쟁에도 그간 투자자들은 '관망 모드'였습니다. 오히려 '보수 인하'와 '최초 상품' 등의 경쟁으로 투자자들은 덕을 봐 왔습니다. 국내 상장된 ETF 개수는 779개에 달합니다. 하지만 최근엔 기업들의 과열 경쟁이 오히려 투자자들을 혼란에 빠트린다는 반성도 들립니다. 동일한 콘셉트의 상품들이 빗발치다보니 투자자들이 상품을 가려내다 못해 투자를 포기하거나 미루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단 얘깁니다.

한 운용사 임원은 "우후죽순 내놓고 보니 버릴 상품들을 더미로 쌓아올린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며 "업계 자정이 필요할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운용사의 임원은 "증시에 식료품 업체가 많다고 해서 식료품 업체 상장하지 말라고 막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않겠느냐"며 "전문가 수시 칼럼 등을 담아 ETF 투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 미국의 ETF 사이트처럼 국내에도 관련 대표 플랫폼이 생겨나면 좋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