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의 시간 여행 '충정각' [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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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18, 잘 지은 서양주택 '충정각'
18, 잘 지은 서양주택 '충정각'
충정로역 배후에는 작은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을지로나 종로 같이 대규모 밀집은 아니지만 ’한 개성‘하는 식당들이 많다. 한옥을 개조해 노포 분위기가 나는 식당부터 현대적 감각으로 폼나게 인테리어를 한 식당들까지 다양하다. 식당 주변 한옥들을 보면 마치 1960년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온 것과 같은 착각이 든다. 출근할 때 종종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고 이곳에 내려 골목을 지나 신문사로 향하곤 했다. 아침 일찍 인적 드문 골목길을 걷다보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오피스맨들이 삼삼오오 골목으로 모여든다.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는 보약과 같은 시간이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것은 직장인들의 행복한 특권일 터. 이 골목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충정각, 오래된 서양식 주택으로 지금은 이탈리안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식당 앞 마당에 쌓여있는 와인병들이다. 그 앞에는 오래된 석등, 탑, 돌 조형물들이 술병들과 부조화 속에 개성을 연출한다. 전편에 소개한 충정아파트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다. 나이로 치면 120살이 훌쩍 넘은 건물, 90대의 충정아파트가 ’아버지 건물‘이라면 이 건물은 ’할아버지 건물‘이다. 낡았지만 외관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기품있는 어르신의 모습과 같다.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오래된, 외관상 손상이 없는 건물을 찾기는 힘들다. 서대문 형무소가 마주 보이는 ’딜쿠샤‘ 정도라면 견주어 볼 수 있을까?
충정각, 일제강점기 때 주소는 ’죽첨정 360번지‘이다. 최근 서양식 저택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자료들을 뒤져보면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1912년 토지조사에 따르면 집주인은 미국인 ’맥렐란(R.A. McLellan)‘이다. 그는 서울에 전기를 공급하던 ‘한성전기회사’의 기사장이었다.
우리나라에 막 전차가 보급된 1899년, 서울의 전차는 일본 동경보다도 먼저 운행됐다. 그러나 전차를 운행할 운전사와 고장 나면 수리 할 기사장(기관사)이 없었다. 맥렐란이 기사장으로 파견돼 왔다. 이곳은 ‘미나리가 물결치던 동네’ 미근동, 만초천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던 중림동의 옆 동네가 아니던가. 한양도성이 굽이쳐 남산자락을 감아 올라가는 것이 보이는 경치였다. 그러다가 전차가 성벽을 뚫고 지나가고 쇠바퀴의 굉음에 소를 몰고 지나가던 촌로가 깜짝 놀라는 동네가 되었다. 이런 변화는 이 동네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도성 안쪽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전차는 충정로에 운행되기 전에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전깃불이 궁궐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집무실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면 신하는 임금의 전화에 큰 절을 하고 수화기를 드는 뭔가 이상한 시대였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신문명을 들고 들어온 서양인들은 곤란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조선 노동자에 비하여 30배나 많은 급여를 받았지만 조선에 산다는 것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옥에 살기 힘들었던 서양인들은 자국에 요청해 건축 재료를 들여왔고 교회와 학교를 짓던 외국인 건축가로 하여금 집을 짓도록 했다.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이 성문 밖, 첫 동네였다. 많은 외국인이 살았는데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이화외고 앞에 있었던 경부선 시발역, 서대문 정거장이 가까웠다. 기차보다 앞서 개통된 전차도 서대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서대문 밖에 자리를 잡았다. 전차를 운행하는 한성전기회사의 책임자 콜브란도 영천시장 앞 평동 1200여평의 대지에 집을 지어 살았다. 전차의 기사장(기관사)인 맬렐런도 이곳 죽첨정 360번지에 1,095평의 땅을 매입해 집을 지었다. 아현고개 앞 평평한 땅, 만초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주택지로서 더할 나위없는 명당이었다. 그는 전차 기사장 일을 하며 미국에서 유행했던 뮤직박스(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나오는 기계)도 수입해 조선 황실에 공급했다고 한다.
1910년 합방이 되자 미국인이 떠났다. 그 자리를 일본인이 채웠다. 1930년대 초, 식산은행 직원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은행 비서과에서 근무한 일본인 타카마츠 류치키이다.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은행은 지금의 명동 롯데 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집 앞 죽첨역(현재 미동초등학교 근처)에서 전차를 타고 안국동에서 내려 한 번 갈아 타면 식산은행으로 출근이 가능했다. 해방 이후에는 배금순이라는 분이 1956년부터 2007년까지 약 50년을 살았다고 한다. 이후 2007년부터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건물 앞에는 100년은 족히 넘은 은행나무가 긴 시간을 지키고 있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앞에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듯한 석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양에서는 볼 수 없는 9각의 첨탑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첨탑의 한 면에 출입구가 있고 외벽에 잇대어 단단한 향나무의 넓은 베란다가 손님을 맞는다. 벽돌로 둥그스름하게 처리한 창문은 190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의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벽난로가 보이고 그림으로 벽면을 장식해 고풍스러운 외관과 어울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릴 적, 부자집 친구네 놀러 간 느낌인데 시간이 주는 여유로움 때문인지 전혀 낯설지 않다. 작은 마루로 연결된 방들이 여러 개고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는 다락방이 재미를 더한다. 이 곳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살았던 일본인 아이도 다락방에 숨어 놀았을 것이다.
청명한 가을, 충정각 뒤뜰에서 파스타를 먹으며 좋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어 보자.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마당의 노란 은행잎은 곧 떨어질 것이다.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여 보자. 1970년까지 이 집 앞을 달렸을 전차의 땡땡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겠지만 120년,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는 들릴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점심시간이 되면 오피스맨들이 삼삼오오 골목으로 모여든다.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는 보약과 같은 시간이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것은 직장인들의 행복한 특권일 터. 이 골목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충정각, 오래된 서양식 주택으로 지금은 이탈리안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식당 앞 마당에 쌓여있는 와인병들이다. 그 앞에는 오래된 석등, 탑, 돌 조형물들이 술병들과 부조화 속에 개성을 연출한다. 전편에 소개한 충정아파트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다. 나이로 치면 120살이 훌쩍 넘은 건물, 90대의 충정아파트가 ’아버지 건물‘이라면 이 건물은 ’할아버지 건물‘이다. 낡았지만 외관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기품있는 어르신의 모습과 같다.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오래된, 외관상 손상이 없는 건물을 찾기는 힘들다. 서대문 형무소가 마주 보이는 ’딜쿠샤‘ 정도라면 견주어 볼 수 있을까?
충정각, 일제강점기 때 주소는 ’죽첨정 360번지‘이다. 최근 서양식 저택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자료들을 뒤져보면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1912년 토지조사에 따르면 집주인은 미국인 ’맥렐란(R.A. McLellan)‘이다. 그는 서울에 전기를 공급하던 ‘한성전기회사’의 기사장이었다.
우리나라에 막 전차가 보급된 1899년, 서울의 전차는 일본 동경보다도 먼저 운행됐다. 그러나 전차를 운행할 운전사와 고장 나면 수리 할 기사장(기관사)이 없었다. 맥렐란이 기사장으로 파견돼 왔다. 이곳은 ‘미나리가 물결치던 동네’ 미근동, 만초천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던 중림동의 옆 동네가 아니던가. 한양도성이 굽이쳐 남산자락을 감아 올라가는 것이 보이는 경치였다. 그러다가 전차가 성벽을 뚫고 지나가고 쇠바퀴의 굉음에 소를 몰고 지나가던 촌로가 깜짝 놀라는 동네가 되었다. 이런 변화는 이 동네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도성 안쪽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전차는 충정로에 운행되기 전에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전깃불이 궁궐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집무실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면 신하는 임금의 전화에 큰 절을 하고 수화기를 드는 뭔가 이상한 시대였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신문명을 들고 들어온 서양인들은 곤란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조선 노동자에 비하여 30배나 많은 급여를 받았지만 조선에 산다는 것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옥에 살기 힘들었던 서양인들은 자국에 요청해 건축 재료를 들여왔고 교회와 학교를 짓던 외국인 건축가로 하여금 집을 짓도록 했다.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이 성문 밖, 첫 동네였다. 많은 외국인이 살았는데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이화외고 앞에 있었던 경부선 시발역, 서대문 정거장이 가까웠다. 기차보다 앞서 개통된 전차도 서대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서대문 밖에 자리를 잡았다. 전차를 운행하는 한성전기회사의 책임자 콜브란도 영천시장 앞 평동 1200여평의 대지에 집을 지어 살았다. 전차의 기사장(기관사)인 맬렐런도 이곳 죽첨정 360번지에 1,095평의 땅을 매입해 집을 지었다. 아현고개 앞 평평한 땅, 만초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주택지로서 더할 나위없는 명당이었다. 그는 전차 기사장 일을 하며 미국에서 유행했던 뮤직박스(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나오는 기계)도 수입해 조선 황실에 공급했다고 한다.
1910년 합방이 되자 미국인이 떠났다. 그 자리를 일본인이 채웠다. 1930년대 초, 식산은행 직원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은행 비서과에서 근무한 일본인 타카마츠 류치키이다.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은행은 지금의 명동 롯데 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집 앞 죽첨역(현재 미동초등학교 근처)에서 전차를 타고 안국동에서 내려 한 번 갈아 타면 식산은행으로 출근이 가능했다. 해방 이후에는 배금순이라는 분이 1956년부터 2007년까지 약 50년을 살았다고 한다. 이후 2007년부터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건물 앞에는 100년은 족히 넘은 은행나무가 긴 시간을 지키고 있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앞에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듯한 석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양에서는 볼 수 없는 9각의 첨탑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첨탑의 한 면에 출입구가 있고 외벽에 잇대어 단단한 향나무의 넓은 베란다가 손님을 맞는다. 벽돌로 둥그스름하게 처리한 창문은 190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의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벽난로가 보이고 그림으로 벽면을 장식해 고풍스러운 외관과 어울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릴 적, 부자집 친구네 놀러 간 느낌인데 시간이 주는 여유로움 때문인지 전혀 낯설지 않다. 작은 마루로 연결된 방들이 여러 개고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는 다락방이 재미를 더한다. 이 곳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살았던 일본인 아이도 다락방에 숨어 놀았을 것이다.
청명한 가을, 충정각 뒤뜰에서 파스타를 먹으며 좋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어 보자.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마당의 노란 은행잎은 곧 떨어질 것이다.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여 보자. 1970년까지 이 집 앞을 달렸을 전차의 땡땡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겠지만 120년,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는 들릴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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