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남은 생을 사는 거야”…노벨문학상 귄터 그라스가 남긴 에세이들 [책마을]
“이제는 다 지난 일. 이제 너무 많은 일을 겪었지. 이제 다 스러지고 다 지나갔어. 이제 모든 것이 느릿느릿. 이제 방귀도 나오지 않으려고 해. 이제 더 이상 불쾌할 일도 없어. 곧 나아지겠지. 느릿느릿 남은 생을 사는 거야. 온 세상 모든 것은 끝이 있으니까.”

2015년 87세의 나이로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는 유고집 <유한함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독일에서 2015년, 국내에서는 최근 출간된 이 독일 소설가의 책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와 에세이 96편과 직접 그린 드로잉 63점을 담았다. 그는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운 조각가이기도 하다.

1999년 노벨상을 받은 그는 야생마 같은 작가였다. 나치즘의 광기 어린 폭력을 고발하고, 과거사를 거듭 일깨우며 민주주의 토대를 다지는 데 평생을 바쳤다. 파시즘의 징후가 어른거리는 곳이라면 글로 몸으로 저항하며 고군분투했다.
“느릿느릿 남은 생을 사는 거야”…노벨문학상 귄터 그라스가 남긴 에세이들 [책마을]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치열함보다 인생에 대한 관조가 많이 엿보인다.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육체와 정신의 노쇠, 죽음에 대한 예감이 그라스 특유의 강건하고도 유머러스한 글에 담겨 있다. 그라스는 2012년부터 일종의 문학 실험으로 이 책을 기획했으나 출간 직전인 2015년 4월 숨을 거뒀다. 책의 부제인 ‘유머로 가득한 이별’은 작가가 30여 년 함께했던 출판사 슈타이들이 연 출판 기념회의 테마였다.

책을 번역한 장희창 전 동의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이 책은 노(老)대가의 솔직함과 경쾌함, 장난기와 진지함이 하나로 뒤섞여 그의 인간적 풍모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