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빈국' 명운, 결국 에너지 정책이 갈랐다 [위기의 독일경제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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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독일경제 ④-에너지 정책 실패가 위기 불렀다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일의 북서쪽 소도시 링겐(Lingen). 총인구가 6만 명도 안될 정도로 작지만 1988년부터 35년 동안 연간 350만가구에 전력을 공급해 온 원자력발전소 ‘엠스란트(Emsland)’가 있다. 니더작센주 주도인 하노버에서 링겐까지 차로 꼬박 4시간을 달리다 보면 거대한 규모의 냉각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엠스란트 원전에는 약 350명의 직원이 근무하면서 94%의 가동률로 연간 약 110억킬로와트시(kWh)의 전력을 생산해 왔다. 지난 4월 15일 오후 10시 공식적으로 가동을 멈추고, 내부적으로 해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 원전을 운영하는 독일 최대 발전 사업자 RWE는 완전 폐쇄까지 약 15년이 걸리며, 발전소 1개당 평균 11억유로(약 1조6000억원)의 해체 비용이 든다고 설명했다.
엠스란트 원전 앞에서 만난 보안요원 알버트 크리스티안은 “이 원전보다 더 오래되고 크기가 작은 원전도 50년째 철거 중”이라며 "더 오래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집권기 원전 폐쇄가 결정된 순간부터 이곳 사람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며 “폐쇄 작업에 직접 관여하는 인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일자리를 다시 구하고 있다”고 했다. 엠스란트 원전은 남부 바이에른주의 이자르2,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네카베스트하임2와 함께 독일의 ‘마지막 세대’ 원전으로 불린다. 이들 원전이 올해 일제히 가동을 중단하면서 23년 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재임 때부터 구상해 온 탈원전 시대가 열리게 됐다. 1961년 첫 원전 가동에 나선 지 62년 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발(發) 에너지 위기로 중단 시점을 한 차례 연장했지만, 탈원전으로 에너지 위기가 더욱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가동 중단 직전 독일 내 반대 여론은 59%였다. 탈원전이 완성된 지 반년 정도 지난 지금도 여론은 엇갈린다. 링겐 도심에서 만난 J.L.씨는 “엠스란트 원전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운영돼 온 사회기반시설(SOC)이었다”며 “이 원전이 문을 닫은 것이 굉장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기자가 한국에서 왔음을 밝히자 그는 “제조업 기반 국가인 독일이 원전을 모두 폐쇄하면 에너지 비용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한국도 그렇지 않냐”고 되물었다. 또 다른 시민 하인스 튀네만씨는 “100% 안전한 원전은 없다”며 “인류가 역사적으로 원자력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은 기간은 길지 않았기 때문에 탈원전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과 2011년 후쿠시마 원전, 두 차례의 사고는 독일에서 녹색당이 세를 얻는 계기가 됐다. 탈원전을 주요 당론으로 삼은 녹색당은 1985년 헤센주를 시작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왔고, 올라프 숄츠 행정부 들어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장관(로베르트 하베크), 외무장관(아날레나 베어보크) 등 핵심 부처 각료직을 배출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 내부에선 “난방비가 300% 올랐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계획대로 탈원전을 감행한 것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독일 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제조업의 혈맥과 같은 값싼 러시아산 가스가 끊기면서 에너지 가격 상승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의 ‘탈(脫)독일’ 러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최근 독일상공회의소(DHIK)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일 3572개 기업 중 절반 가량인 52%가 에너지 전환 정책이 자사 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한 것으로 집계됐다. 또 제조업체 약 3분의 1이 해외로 생산시설 이전을 고려중이거나 진행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제조업 강국’이었던 독일이 ‘산업 공동화(deindustrialization)’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한국과 같이 ‘자원 빈국’에 속하는 독일 경제 모델의 명운은 결국 에너지 정책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제는 속도다. DHIK는 "원자력 에너지의 퇴출, 전력망 요금 상승으로 인한 에너지 문제는 장기적으로 독일 기업들에 부담이 될 것"이라며 "재생에너지 등의 개발은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화학업체 에포니크 인더스트리의 크리스티안 쿨만 최고경영자(CEO)는 AP통신에 “높은 에너지 비용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대응으로 새 공장과 고임금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며 “러시아산 가스의 상실은 독일 비즈니스 모델에 큰 타격”이라고 말했다. 이 업체도 코로나19 백신 제조의 주요 원료인 지질 생산 공장을 미국 인디애나주에 짓기로 결정했다.
독일 투자은행 베렌버그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에너지 집약적인 생산 공정을 전기 및 가스가 저렴한 미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이전하면 독일은 현재 산업 생산 능력의 2~3%가량 잃게 된다.
링겐=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엠스란트 원전에는 약 350명의 직원이 근무하면서 94%의 가동률로 연간 약 110억킬로와트시(kWh)의 전력을 생산해 왔다. 지난 4월 15일 오후 10시 공식적으로 가동을 멈추고, 내부적으로 해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 원전을 운영하는 독일 최대 발전 사업자 RWE는 완전 폐쇄까지 약 15년이 걸리며, 발전소 1개당 평균 11억유로(약 1조6000억원)의 해체 비용이 든다고 설명했다.
엠스란트 원전 앞에서 만난 보안요원 알버트 크리스티안은 “이 원전보다 더 오래되고 크기가 작은 원전도 50년째 철거 중”이라며 "더 오래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집권기 원전 폐쇄가 결정된 순간부터 이곳 사람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며 “폐쇄 작업에 직접 관여하는 인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일자리를 다시 구하고 있다”고 했다. 엠스란트 원전은 남부 바이에른주의 이자르2,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네카베스트하임2와 함께 독일의 ‘마지막 세대’ 원전으로 불린다. 이들 원전이 올해 일제히 가동을 중단하면서 23년 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재임 때부터 구상해 온 탈원전 시대가 열리게 됐다. 1961년 첫 원전 가동에 나선 지 62년 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발(發) 에너지 위기로 중단 시점을 한 차례 연장했지만, 탈원전으로 에너지 위기가 더욱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가동 중단 직전 독일 내 반대 여론은 59%였다. 탈원전이 완성된 지 반년 정도 지난 지금도 여론은 엇갈린다. 링겐 도심에서 만난 J.L.씨는 “엠스란트 원전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운영돼 온 사회기반시설(SOC)이었다”며 “이 원전이 문을 닫은 것이 굉장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기자가 한국에서 왔음을 밝히자 그는 “제조업 기반 국가인 독일이 원전을 모두 폐쇄하면 에너지 비용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한국도 그렇지 않냐”고 되물었다. 또 다른 시민 하인스 튀네만씨는 “100% 안전한 원전은 없다”며 “인류가 역사적으로 원자력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은 기간은 길지 않았기 때문에 탈원전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과 2011년 후쿠시마 원전, 두 차례의 사고는 독일에서 녹색당이 세를 얻는 계기가 됐다. 탈원전을 주요 당론으로 삼은 녹색당은 1985년 헤센주를 시작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왔고, 올라프 숄츠 행정부 들어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장관(로베르트 하베크), 외무장관(아날레나 베어보크) 등 핵심 부처 각료직을 배출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 내부에선 “난방비가 300% 올랐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계획대로 탈원전을 감행한 것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독일 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제조업의 혈맥과 같은 값싼 러시아산 가스가 끊기면서 에너지 가격 상승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의 ‘탈(脫)독일’ 러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최근 독일상공회의소(DHIK)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일 3572개 기업 중 절반 가량인 52%가 에너지 전환 정책이 자사 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한 것으로 집계됐다. 또 제조업체 약 3분의 1이 해외로 생산시설 이전을 고려중이거나 진행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제조업 강국’이었던 독일이 ‘산업 공동화(deindustrialization)’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한국과 같이 ‘자원 빈국’에 속하는 독일 경제 모델의 명운은 결국 에너지 정책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제는 속도다. DHIK는 "원자력 에너지의 퇴출, 전력망 요금 상승으로 인한 에너지 문제는 장기적으로 독일 기업들에 부담이 될 것"이라며 "재생에너지 등의 개발은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화학업체 에포니크 인더스트리의 크리스티안 쿨만 최고경영자(CEO)는 AP통신에 “높은 에너지 비용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대응으로 새 공장과 고임금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며 “러시아산 가스의 상실은 독일 비즈니스 모델에 큰 타격”이라고 말했다. 이 업체도 코로나19 백신 제조의 주요 원료인 지질 생산 공장을 미국 인디애나주에 짓기로 결정했다.
독일 투자은행 베렌버그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에너지 집약적인 생산 공정을 전기 및 가스가 저렴한 미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이전하면 독일은 현재 산업 생산 능력의 2~3%가량 잃게 된다.
링겐=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