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이슈 찬반토론] 50년 넘은 미술품 해외 판매 금지, 합리성 있나
한국에는 제작된 지 50년이 넘은 미술 작품의 해외 반출을 제한하는 법이 있다. 1962년에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제39, 60조)과 그 시행령에 명시돼 있다.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법이다. 문화재청 산하의 심의위원회를 거쳐 승인을 받으면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술품의 반출을 막기 위한 법이다. 이 법 때문에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같은 한국 현대미술 거장들의 명품이 국제 미술품 시장에 내걸릴 수가 없다. 최근(2023년 10월 11~15일)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미술품 장터)인 ‘프리즈 마스터스’에 참가하려던 국내 굴지의 한 화랑도 이 법 때문에 한국 유명 조각가의 작품을 국제 무대에 선보이지 못했다.

문화재 규제가 ‘문화 쇄국’을 만들면서 한국 예술의 세계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국내 미술품의 국제시장 판매 제한, 정당성·합리성이 있나.

[찬성] 전반적인 고급 문화재 보호 차원한국 작가의 명작·걸작 국내 향유 유도

국내 미술품의 해외 반출을 막는 문화재보호법의 근본 취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외 판매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는 게 아니라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판단을 거쳐 판매하게 한다. 아예 막는다기보다 제한을 가하는 정도다. 원래 이 법의 근본 취지는 국보와 보물 등 ‘지정문화재’를 잘 보호하자는 데 있다. 그러다가 그림·조각 같은 ‘일반 동산 문화재’를 포함시켰다. 큰 틀에서는 한국의 문화재를 한국인들 손이 바로 닿는 곳에서 보호하자는 의지가 깔려 있다.

해외에도 이런 사례는 있다. 아르헨티나 같은 데서는 현존 작가의 해외 전시 자체가 허가제다. 작가 작품의 해외 판매, 수출을 위해서는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 걸작 예술 작품의 무차별적 해외 유출은 국가의 자산 유출이고, 외화 반출이라는 측면도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 이런 일이 투명하지 않은 회계로 상습화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미술작품까지 값비싼 가격에 해외로 다 나가버리면 국내 문화예술계는 황폐화할 수 있다.

걸작 그림과 명품 조각 등을 다양하게 보유·전시하는 유명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해외에는 상당히 많다. 경제 선진국일수록 문화적으로도 선진국이어서 흔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이 모두 손쉽게 해외로 나가서 그런 작품을 감상하는 문화적 향수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법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을 때 제정됐다. 그래서 시대 변화에 기민하고 유연하게 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은 전통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예술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미술작품을 최대한 국내에서 보관하고 지키는 장치를 두는 것은 의미가 있다. 행여 좋은 작품이 높은 가격에 유혹돼 줄줄이 해외로 나가버리면 국내의 많은 미술관·박물관·기념관은 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반대] 'K미술 세계화' 막는 낡은 법 바꿔야예술의 해외 진출은 문화 선진국의 길

국제 미술품 시장 규모는 갈수록 커진다. ‘프리즈 서울’도 세계인의 관심 속에 국제 아트페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국내 시장도 커지지만 반쪽 성장이다. 한국 작품이 해외 무대에서 잘 판매되는 것이 제대로 된 국제적 평가를 받는 길이다. 제정된 지 60년이 넘은 문화재보호법이 국내 작품의 해외 아트페어 참가를 제한하면서 ‘K-미술의 세계화’를 가로막고 있다. 2023년10월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마스터스’에서도 한국 작가 작품의 국제 진출이 또 막혔다.

세계 최고의 아트페어인 이 행사에서 수백 년에 걸친 근·현대 유명 작가들의 걸작이 미술 애호가들의 비상한 관심 속에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거래되었다. 하지만 ‘판매용 반출 제한’ 규제 때문에 남의 나라 얘기가 됐다.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은 아예 출품하지 못했다. 서울의 한 유명 갤러리는 다른 저명 작가의 1962년 작품을 이 행사에서 선보이려 했으나 문제의 규제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제작 50년’이라는 반출 제한 기준도 근거가 없다. 왜 50년인지, 합리적인 설명이 없다. 그냥 50년이다. 같은 작가의 1974년 작품은 해외 무대에 나갈 수 있고, 1973년 작품은 불가능하다는 게 이성적·상식적인가. 런던 행사에서 다양한 작품이 소유주의 국적을 뛰어넘으며 세계인의 관심 속에 ‘명품 중의 명품’으로 한층 격을 높여간 것을 보면 한국형 갈라파고스 규제일 뿐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좁은 국내 시장을 넘어 ‘가격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고, 국제적 평가·인정도 충분히 받을 때 많은 한국 작가가 세계 미술계에 우뚝 설 수 있다. 그럴 때 인재들이 예술 창작에 더 몰두한다.

국보·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아닌 ‘일반 동산 문화재’에 대해서는 융통성 있게,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해외 수집가가 한국 작품을 구입해 좋은 미술관에 잘 전시하면 문화의 국위선양이다.

√ 생각하기 이건희 컬렉션엔 환호하면서 '문화 쇄국'…K팝·K드라마 어떻게 성장 했나

[시사이슈 찬반토론] 50년 넘은 미술품 해외 판매 금지, 합리성 있나
해외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폐쇄 규제는 한국 문화예술계의 숙원인 국제 무대 진출을 가로막는다. 세계적 명품을 폭넓게 수집한 ‘이건희 컬렉션’에는 환호와 탄성을 보내면서 해외의 큰손 수집가가 한국 걸작에는 손도 못 대게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고 균형감도 없다. 문화계 갈라파고스 규제로 미술가 등 문화예술인들을 국내에만 붙잡아둬선 안 된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어떻게 창의적인 작가들을 길러낼 수 있겠나. 선진국에 진입한 국가라면서 ‘국내 시장’만 강요하는 제도하에서 역량을 갖춘 청년들이 전문적인 직업 예술인의 꿈을 계속 가꾸어갈 수 있을까. ‘문화 쇄국’에 빠지면 한국 예술의 미래는 밝지 않다. 한류 붐을 단단히 일으킨 K-팝·K-드라마 모두 부단한 국제화로 이만큼 성장했다. 좋은 작품이 해외로 판매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좋은 무대에서 더욱 명작 대접을 받으며 한국을 빛낼 수도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