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악은 평범하다" 외친 한나 아렌트의 모든 것
사람들은 흔히 ‘악(惡)’을 별나게 생각한다. 악인은 평범한 시민과는 전혀 다른 끔찍한 괴물이고, 그의 악행은 철저하게 의도된 결과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악하지 않다’는 믿음이 그 아래에 깔려 있다.

20세기 저명한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이런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독일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그는 ‘악은 평범하다. 거대한 악의 뿌리에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게으름과 멍청함이 있을 뿐이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고, 이 개념은 훗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역작으로 출간된다.

[책마을] "악은 평범하다" 외친 한나 아렌트의 모든 것
최근 국내 출간된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아렌트가 일생 동안 발전시킨 사유의 과정을 한 권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그의 조교 출신인 제롬 콘이 아렌트의 글을 엮었다. 아렌트가 47세이던 1953년부터 70세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남긴 글, 강연, 서평, 대담 등을 집필 순서대로 실었다. ‘악의 평범성’ 정도만 들어봤을 뿐 아렌트의 철학을 깊이 들여다본 적 없고, 그럼에도 아렌트를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 만하다.

아렌트가 평생에 걸쳐 주장한 내용은 ‘사유하라. 위험은 무(無)사유에서 나온다’로 요약할 수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대로 살면,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판단도 인식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가 없는 삶은 잘못된 사고보다 위험하다는 게 아렌트의 주장이다.

“사유는 위기에 대면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사유가 위기를 제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사유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대면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새롭게 준비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의 핵심은 ‘언어’와 ‘상상력’이다. 책을 번역한 신충식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언어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어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특수한 방식으로 형성해준다”고 설명했다. 또 사유는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책 제목은 이런 아렌트의 사상을 요약한다.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누군가의 의견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 사유하는 일을 뜻한다. 아렌트가 1972년 캐나다 토론토 사회정치사상연구회가 주관한 학술회의에서 한 참여자와 나눈 대화에서 따왔다.

“여러분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난간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난간을 잡지 않고 세상이라는 계단을 오르는 건 위태롭고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이라면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다. 800쪽이 넘는 분량에다가 내용도 심오하다. 책 끝부분에 실린 ‘옮긴이 해제 및 후기’가 그나마 독자가 기댈 만한 난간 역할을 한다. 순서대로 글을 읽어나가기 부담스러운 독자에게는 ‘자유와 정치에 관한 강연’ ‘인간의 조건에 관해’ ‘현대 사회의 가치들’ 등 강연과 대담 목차부터 읽어보는 방법을 권한다. 구은서 기자

한경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