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최하영이 지난 2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첫 협연을 펼치고 있다. ⓒ서울시향
첼리스트 최하영이 지난 2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첫 협연을 펼치고 있다. ⓒ서울시향
파비엥 가벨이 서울시향과 다시 만났다. 이미 서울시향과 두 번이나 함께한 적이 있는 지휘자다. 첫 곡은 코른골트의 ‘슈트라우스 이야기’였다. 다양한 왈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했는데, 장면이 전환되는 연결고리를 아주 매끄럽고 유연하게 처리했다. 덕분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모습을 드러낼 때 역시 드라마틱했다. 찰나의 여백 이후, 도나우강이 등장하는 모습과 순식간에 사라지며 자취를 감추는 모습은 환상 속에 머무는 존재처럼 연출되었다.

이어지는 무대는 첼리스트 최하영의 서울시향 데뷔 무대였다. 최하영은 작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첼리스트다. 우승 이후 국내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갔지만, 서울시향과의 협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데뷔 무대에서 최하영이 고른 곡은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탁월했다.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어느 작품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각각의 변주들은 매번 다양한 표현을 요구하는데, 최하영은 그때마다 필요한 표현들을 꺼내보였다. 특히 6번째 변주에서는 깊은 감정을 노래할 수 있는 첼리스트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앙코르는 바흐였다. 본공연보다 높은 완성도의 음악을 보여주었다. 단 한대의 첼로지만 여러 목소리가 있었고,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울림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서울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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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 연주된 작품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었다. 완벽한 앙상블은 아니었지만, 아주 생생한 ‘환상교향곡’이었다. 다른 작품도 아닌 ‘환상교향곡’이었기 때문에 생동감에 초점이 맞춰진 접근은 효과적으로 다가왔다. 말 그대로 ‘환상’이지만 작곡가는 안갯속의 흐린 모습이 아니라, 마치 눈앞에 있는 분명한 실체를 표현하듯이 생생하게 대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환상 속 실체들은 지휘자 파비앵 가벨과 함께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특히 마지막 악장이 그랬다. 5악장은 ‘마녀들의 밤의 향연과 꿈’으로 마녀를 포함한 온갖 귀신들이 등장하는 악장이다. 곳곳에서 날뛰는 소리, 웃음소리, 울음소리, 고함소리가 기괴하게 들려오며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혼란스럽게 들려 음악의 매력이 잘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캐릭터들이 정신없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뒤섞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비앵 가벨은 계획적으로 각각의 캐릭터들을 생생하고 분명하게 구축했다. 지휘자가 각 표현들이 가지는 정체성을 센스 있게 진단해낸 것이다. 덕분에 작품이 굉장히 입체적으로 들렸다. 밋밋한 흑백 화면 속 ‘환상교향곡’이 아니라, 4K로 생생하게 보는 ‘환상교향곡’이 되었다. 지휘자 개인의 해석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었다. 객원수석으로 참여한 얀 보보릴(체코 필하모닉 호른 수석)과 마이카 윌킨슨(피츠버그 심포니 트럼펫 수석)은 작품 내내 활약했다. 두드러지는 멜로디를 연주한 건 아니지만, 단단한 음향 기둥을 만들어 곳곳에서 앙상블의 밀도를 높였다.

또 지휘자가 작품이 가진 리듬에 공들인게 눈에 띄었다. 세부적인 리듬들이 강조되고, 그 리듬이 다른 종류의 리듬들과 결합할 때면 작품에 속도감과 박진감을 더했다. 오케스트라가 지휘자가 원하는 리듬을 완벽하게 소화한 건 아니지만, 관객들이 작품 속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세세한 리듬들이 모두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게 곧 작품의 맥박이 되었다.

공연과 별개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바로 ‘안다박수’였다. ‘안다박수’는 이 곡이 언제 끝나는지 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곡이 끝나자마자 박수를 치는 행위를 뜻한다. 심지어는 곡이 끝나기가 무섭게 “브라보”를 외치며 작품이 주는 여운을 모조리 파괴했다. 마지막 음이 끝난다고 음악이 전부 끝나는 건 아니다. 마지막 잔향과 함께 찾아오는 여운은 본공연 못지않은 큰 감동을 이끌어낸다. ‘환상’ 속에 머물렀던 관객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 그런 성급한 브라보가 꼭 필요했을까?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