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건반' 거장 피아니스트 브론프만 "연주할 땐 고통도 삼켜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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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
11월 11일 RCO와 내한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
"사적인 감정 배제…작품 고유의 감정에 몰두해야"
"스페셜리스트 안 좋아해…한계 만들고 싶지 않아"
11월 11일 RCO와 내한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
"사적인 감정 배제…작품 고유의 감정에 몰두해야"
"스페셜리스트 안 좋아해…한계 만들고 싶지 않아"
'피 묻은 피아노'. 2015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찍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사진에 붙은 짧은 문구다. 이날 환한 조명에 눈부시게 반짝여야 할 피아노의 흰 건반 곳곳엔 이리저리 튄 핏방울이 흥건히 맺혀 있었다.
마치 스릴러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 사진의 주인공은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65). 공연 당일 날카로운 물체에 손가락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그가 연주를 강행한 게 이런 결과를 낳았다.
연주 도중 수술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서 건반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던 것. 그러나 극한의 상황에도 브론프만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에 앙코르까지 선보이고 나서야 그는 무대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청중을 실망하게 할 순 없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치명적이었던 손 부상에도 왜 연주를 취소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가 한 답이다.
'피의 명연(名演)'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 거장 피아니스트 브론프만이 한국을 찾는다. 오는 11월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파비오 루이지 지휘)의 내한 공연에서 협연하기 위해서다. RCO는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최정상 악단이다. 22일 한국경제신문과 서면으로 만난 브론프만의 연주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손에서 피가 나도, 옆에서 아무리 혼란스러운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나도 피아니스트는 오로지 연주에 몰두해야 합니다. 연주할 때만큼은 어떤 고통에서도, 어떤 불편에서도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연주자는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이잖아요. 좋은 연주를 보여줄 수 없다면 어떤 설명도 변명일 뿐입니다."
브론프만은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같은 명지휘자들이 앞다퉈 찾는 거장 피아니스트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10대 때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1989년 카네기홀 데뷔 무대로 이름을 알렸다. 그로부터 2년 만인 1991년 미국의 전도유망한 연주자에게 주는 에이버리 피셔상을 받은 브론프만은 1997년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앨범으로 그래미상까지 차지하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랐다. 이후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RCO 등 세계 정상을 다투는 악단과 꾸준히 협연하며 수많은 호연을 남겨왔다.
브론프만이 이번 공연에서 연주하는 작품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단악장이지만 서정적인 주제가 변주를 거듭하면서 매 순간 새로운 테크닉과 다채로운 음향을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리스트 협주곡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악상들이 담겨 있습니다.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작품 안에 담긴 고유의 감정에 오롯이 집중해 청중에게 당시 리스트의 생각과 심경을 더 가까이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에겐 흔히 '러시아 낭만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정작 브론프만은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 작곡가 작품이든 헝가리 작곡가 리스트의 작품이든 자신에겐 모두 똑같이 의미 있는 음악이란 이유에서다.
"러시아, 헝가리, 독일, 프랑스로 나눌 것 없이 모든 음악이 제겐 각별해요. 각각의 작품에 그만의 특색이 담겨있고, 서로 다른 면들이 명료히 드러나기 때문이죠. 몇몇 음악만 좋아하거나 잘 치는 건 어떤 연주자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특정한 단어로 제 한계를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브론프만은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이 두터운 피아니스트다. 1988년부터 꾸준히 방한한 덕분이다. 2019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에서 협연을 맡은 인물도 그였다.
"한국의 문화, 교육 모두 좋아하지만 특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청중의 뜨거운 관심을 좋아합니다. 정말 열정적이죠. 또 한국 연주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정 트리오'(첼리스트 정명화·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피아니스트 정명훈),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등의 연주를 매우 인상 깊게 봤습니다. 한국에서 연주할 수 있는 건 제게 언제나 큰 기쁨이에요."
그는 RCO에 대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RCO는 실력, 명성, 전통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예요. 이들 고유의 사운드는 짙으면서도 독특합니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도 악단의 개성이 완연히 드러나요. 연륜과 유연함을 모두 갖추고 있는 오케스트라라고 할까요. 워낙 실력 있는 악단인 만큼 좋은 앙상블을 이뤄낼 것이란 데엔 한 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RCO는 베버 '오베론' 서곡,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등도 연주한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마치 스릴러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 사진의 주인공은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65). 공연 당일 날카로운 물체에 손가락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그가 연주를 강행한 게 이런 결과를 낳았다.
연주 도중 수술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서 건반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던 것. 그러나 극한의 상황에도 브론프만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에 앙코르까지 선보이고 나서야 그는 무대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청중을 실망하게 할 순 없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치명적이었던 손 부상에도 왜 연주를 취소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가 한 답이다.
'피의 명연(名演)'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 거장 피아니스트 브론프만이 한국을 찾는다. 오는 11월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파비오 루이지 지휘)의 내한 공연에서 협연하기 위해서다. RCO는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최정상 악단이다. 22일 한국경제신문과 서면으로 만난 브론프만의 연주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손에서 피가 나도, 옆에서 아무리 혼란스러운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나도 피아니스트는 오로지 연주에 몰두해야 합니다. 연주할 때만큼은 어떤 고통에서도, 어떤 불편에서도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연주자는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이잖아요. 좋은 연주를 보여줄 수 없다면 어떤 설명도 변명일 뿐입니다."
브론프만은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같은 명지휘자들이 앞다퉈 찾는 거장 피아니스트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10대 때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1989년 카네기홀 데뷔 무대로 이름을 알렸다. 그로부터 2년 만인 1991년 미국의 전도유망한 연주자에게 주는 에이버리 피셔상을 받은 브론프만은 1997년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앨범으로 그래미상까지 차지하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랐다. 이후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RCO 등 세계 정상을 다투는 악단과 꾸준히 협연하며 수많은 호연을 남겨왔다.
브론프만이 이번 공연에서 연주하는 작품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단악장이지만 서정적인 주제가 변주를 거듭하면서 매 순간 새로운 테크닉과 다채로운 음향을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리스트 협주곡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악상들이 담겨 있습니다.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작품 안에 담긴 고유의 감정에 오롯이 집중해 청중에게 당시 리스트의 생각과 심경을 더 가까이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에겐 흔히 '러시아 낭만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정작 브론프만은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 작곡가 작품이든 헝가리 작곡가 리스트의 작품이든 자신에겐 모두 똑같이 의미 있는 음악이란 이유에서다.
"러시아, 헝가리, 독일, 프랑스로 나눌 것 없이 모든 음악이 제겐 각별해요. 각각의 작품에 그만의 특색이 담겨있고, 서로 다른 면들이 명료히 드러나기 때문이죠. 몇몇 음악만 좋아하거나 잘 치는 건 어떤 연주자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특정한 단어로 제 한계를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브론프만은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이 두터운 피아니스트다. 1988년부터 꾸준히 방한한 덕분이다. 2019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에서 협연을 맡은 인물도 그였다.
"한국의 문화, 교육 모두 좋아하지만 특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청중의 뜨거운 관심을 좋아합니다. 정말 열정적이죠. 또 한국 연주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정 트리오'(첼리스트 정명화·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피아니스트 정명훈),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등의 연주를 매우 인상 깊게 봤습니다. 한국에서 연주할 수 있는 건 제게 언제나 큰 기쁨이에요."
그는 RCO에 대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RCO는 실력, 명성, 전통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예요. 이들 고유의 사운드는 짙으면서도 독특합니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도 악단의 개성이 완연히 드러나요. 연륜과 유연함을 모두 갖추고 있는 오케스트라라고 할까요. 워낙 실력 있는 악단인 만큼 좋은 앙상블을 이뤄낼 것이란 데엔 한 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RCO는 베버 '오베론' 서곡,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등도 연주한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