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나주역사 앞에 설치된 김병호의 '3명의 신'.
구 나주역사 앞에 설치된 김병호의 '3명의 신'.
전라도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건 고려시대인 1018년. 당시 전국 행정구역을 개편하던 고려가 호남 지역에 대표 도시였던 전주와 나주를 합한 이름을 붙인 게 시작이었다. 이후 구한말까지 900여년 동안 전주와 나주는 호남의 ‘맹주’로 군림해왔다. 두 도시 곳곳에 즐비한 고풍스러운 문화재들은 이런 풍요로웠던 과거를 증명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 도시의 위상은 예전과 딴판이다. 특히 나주의 추락은 심각한 수준이다. 전주는 그나마 전북 최대 도시의 명맥을 잇고 있지만, 나주는 전남 5개 도시 중 규모가 가장 작은 ‘평범한 지방 도시’로 전락했다. 나주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도 이제는 배, 곰탕, 홍어 등 고작 특산물 몇 개 뿐이다.

나주시가 올해부터 매년 영산강국제설치미술제를 열기로 한 건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나주의 매력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올해 행사에서는 나주시 원도심 반경 3km 남짓 거리에 펼쳐진 문화재 등 공공장소 10곳 앞에 한국·일본·베트남·독일 등 작가 15명의 작품 16점을 배치했다. 설치미술과 함께 지역 문화·역사 유산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꾸몄다는 게 큐레이터들의 설명이다. 백종옥 전시감독은 “전국 각지에서 지역미술제가 열리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일부러 찾아가서 볼 만한 미술제는 많지 않다”며 “영산강국제설치미술제에서는 나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예술과 문화재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민성홍의 'Drift_비정형'
민성홍의 'Drift_비정형'
대표적인 장소가 나주 동점문 근처에 있는 폐공장이자 근대유산 산업시설인 구(舊) 화남산업이다. 일본인이 설립한 이 통조림 공장은 일제강점기 쇠고기 통조림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하루 300마리에 달하는 소가 여기서 도축돼 통조림으로 만들어져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급됐다. 곰탕이 나주를 대표하는 음식이 된 것도 이 공장의 영향이 컸다. 공장은 통조림 생산을 하고 남은 소의 부속을 조선인 상인들에게 헐값에 넘겼다. 상인들은 이를 오랫동안 끓인 뒤 국밥으로 만들어 팔았고, 이는 지금의 나주곰탕이 됐다.

이번 미술제에서 폐공장은 작가 3인의 전시공간으로 변신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베트남 작가 하이뚜가 그린 벽화다. 화면의 중심에는 눈물을 흘리는 듯한 소의 도상과 함께 소나무, 달, 구름 등 도가적인 소재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인간들의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소들을 애도하는 그림이다. 중견 설치작가 민성홍의 ‘Drift_비정형’,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의 ‘책 읽어주는 소녀’는 전투식량을 만들던 공간에서 평화와 문화를 꿈꾼다는 의미가 담긴 작품이다.
이이남의 '책 읽어주는 소녀'
이이남의 '책 읽어주는 소녀'
지난 20일 개막 후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은 편이다. 행사 관계자는 “전시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니 문화재와 장소에 얽힌 역사가 절로 궁금해진다는 관람객들이 많다”고 했다. 금성관 앞뜰에 강용면이 밥과 밥그릇을 모티브로 설치한 작품 ‘온고지신’도 이런 반응이 많았던 작품이다. 금성관은 조선시대 나주목의 손님이 묵는 곳으로, 오늘날로 치면 영빈관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백 감독은 “영빈관에서 손님에게 밥을 내드리듯 나주와 영산강국제설치미술제에 온 귀한 손님들을 환영하고 잘 대접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배치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11월 30일까지 열린다.

나주=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