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 설화'·아스피린…천변만화 '버들 문화'[고두현의 문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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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드나무의 생태인문학
천천히 마시라고 버들잎 띄워준
'표주박 처녀'의 지혜에 반한 왕
시냇가와 나루터서 헤어질 땐
이별의 情恨과 재회의 꿈 나눠
항염 해열 진통 등 '치유의 나무'
100년 전 유한양행 로고 등장
고두현 시인
천천히 마시라고 버들잎 띄워준
'표주박 처녀'의 지혜에 반한 왕
시냇가와 나루터서 헤어질 땐
이별의 情恨과 재회의 꿈 나눠
항염 해열 진통 등 '치유의 나무'
100년 전 유한양행 로고 등장
고두현 시인
버드나무는 물만 있으면 잘 자란다. 낙엽 교목이지만 초겨울까지 잎이 파릇파릇하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오동나무는 천년 늙어도 항상 그 곡조 간직하고/ 매화는 추운 겨울 꽃 피우나 향기 팔지 않네/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본래 그대로이고/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또 올라오네’(조선 중기 신흠·申欽)라는 한시처럼 늘 싱그럽다.
버드나무는 은행나무와 같이 암수딴그루다. 가로수로 활용할 때 수그루만 심으면 버들씨가 날리지 않는다. 고목의 썩은 원줄기에는 빛을 내는 인(燐) 성분이 많아 옛사람들이 이를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다. 버드나무는 전 세계에 고루 분포한 만큼 이에 관한 생태문화 이야기도 풍부하다.
구비문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두 가지 다 그럴듯한 설(說)이지만, 구전 설화의 특성상 원래 이야기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왕조의 창업자인 두 인물이 아니라 지나가던 무관이나 선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원형 설화가 먼저 있었다. 우물가 처녀의 지혜는 각종 설화나 야담을 다룬 <대동기문>의 이교리, 이장곤에 대한 일화에도 나온다. 이왕이면 이름 없는 이보다 유명한 인물을 갖다 붙이는 게 더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풍습이 있었다. 버들 류(柳)가 머무를 류(留)와 독음이 같기 때문이다.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liu) 또한 같다. 버들을 이별의 증표로 삼은 고사 중에 유명한 것은 당나라 수도 장안의 파수절류(水折柳)와 위수절류(渭水折柳)다.
장안의 동쪽에 파수라는 강이 흐르는데 거기에 놓인 다리를 파교(橋)라고 했다. 사람들이 파교에서 이별할 때 수양버들 가지를 꺾어 떠나는 사람에게 건넸다고 한다. 명나라 희곡 <자채기>의 여주인공이 애인에게 버들가지로 장도를 빌어주는 장면 이후 파교의 버들은 이별의 징표로 굳어졌다. 당시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위수 가에서 버드나무를 꺾어 둥근 고리를 만들어 줬다. 고리를 뜻하는 한자 환(環)은 ‘돌아오다’는 뜻의 환(還)과 발음이 같으므로 빨리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작별인사였다.
우리 고전문학에서도 이별의 장소엔 버드나무가 있다. 헤어지는 연인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는 모습도 비슷하다. 조선 시대 기생 홍랑(洪娘)은 당대 문장가 최경창(崔慶昌)과 이별하며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라는 시조로 아픔을 달랬다.
서양 문화에서는 버드나무가 여성성과 사랑을 상징하는 나무로 자주 등장한다. 슬라브 문화에서는 봄의 시작을 축하하는 전통 행사 때 버드나무로 만든 인형이나 장식품을 활용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노르딕 신화에서는 버드나무가 보호와 의료의 특성을 가진 나무로 쓰였다.
의약계에서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치유의 나무’로 통한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진통·해열제인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의 주성분은 버드나무 가지에 들어 있는 쓴맛이다. 서양 의학의 선구자 히포크라테스는 임산부가 통증을 호소하면 버들잎을 씹으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후 수천 년간 민간요법으로 쓰던 것을 1899년 독일 바이엘 제약사 연구원 펠릭스 호프만이 상용화한 게 지금의 아스피린이다.
국내 제약업계 매출 1위 회사인 유한양행의 로고도 버드나무다. 창립자 유일한이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서재필의 딸이 지금의 로고를 그려 줬다고 한다. 이 로고는 약 100년이 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치통을 앓는 사람에게 버드나무 껍질을 달여서 입에 넣고 양치한 뒤 뱉어내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버드나무 잎과 껍질에 통증을 줄여주는 물질이 있다”며 해열 진통제로 사용했고, 기원전 6세기에 버드나무로 이쑤시개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현대 의학 논문에도 버드나무의 항염, 진통, 구강 치료 효능이 크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봄이 오면 버드나무꽃이 활짝 핀다. 이 꽃이 강아지처럼 보들보들하게 생겨 ‘버들강아지’ ‘버들개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갯버들의 꽃을 ‘버들고양이’(ねこやなぎ·네코 야나기)라고 한다. 만주 지역에서는 물과 생명의 상징인 버드나무를 숭배했다. 여기에서 ‘유화(柳花·버들꽃) 부인’ 설화가 탄생했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쉽다. 가지를 꺾어 땅에 꽂아만 둬도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틔운다. 물에 녹아 있는 질소와 인산을 흡수해 물을 깨끗이 하는 정화 능력까지 있다. 그래서 우물가에 많이 심는다. ‘우물가 설화’에 버들잎이 단골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봄부터 초겨울까지 푸른 옷을 입고 서 있는 버드나무. 그 싱싱한 자태로 오랫동안 인류 문화사에 다채로운 채색을 하며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나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의약계 인재들에게 신약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구비전승 설화에 현대적인 콘텐츠를 입히며, 문학과 미술, 영화와 게임에도 새로운 아이템을 건네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버드나무는 은행나무와 같이 암수딴그루다. 가로수로 활용할 때 수그루만 심으면 버들씨가 날리지 않는다. 고목의 썩은 원줄기에는 빛을 내는 인(燐) 성분이 많아 옛사람들이 이를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다. 버드나무는 전 세계에 고루 분포한 만큼 이에 관한 생태문화 이야기도 풍부하다.
버들 류(柳)·머무를 류(留) 닮아
가장 많은 얘기는 사랑과 이별에 얽힌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우물가 처녀 설화가 유난히 많다. 첫 번째는 고려 태조 왕건이 우물가에서 한 처녀에게 물을 달라고 했더니 천천히 마시라고 물 위에 버들잎을 띄워서 줬다는 얘기다. 그 처녀가 나중에 장화왕후가 된 오씨라는 것. 두 번째는 조선 태조 이성계다. 왕건과 거의 똑같은 설화인데 이때의 처녀는 신덕왕후 강씨라고 한다.구비문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두 가지 다 그럴듯한 설(說)이지만, 구전 설화의 특성상 원래 이야기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왕조의 창업자인 두 인물이 아니라 지나가던 무관이나 선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원형 설화가 먼저 있었다. 우물가 처녀의 지혜는 각종 설화나 야담을 다룬 <대동기문>의 이교리, 이장곤에 대한 일화에도 나온다. 이왕이면 이름 없는 이보다 유명한 인물을 갖다 붙이는 게 더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풍습이 있었다. 버들 류(柳)가 머무를 류(留)와 독음이 같기 때문이다.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liu) 또한 같다. 버들을 이별의 증표로 삼은 고사 중에 유명한 것은 당나라 수도 장안의 파수절류(水折柳)와 위수절류(渭水折柳)다.
장안의 동쪽에 파수라는 강이 흐르는데 거기에 놓인 다리를 파교(橋)라고 했다. 사람들이 파교에서 이별할 때 수양버들 가지를 꺾어 떠나는 사람에게 건넸다고 한다. 명나라 희곡 <자채기>의 여주인공이 애인에게 버들가지로 장도를 빌어주는 장면 이후 파교의 버들은 이별의 징표로 굳어졌다. 당시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위수 가에서 버드나무를 꺾어 둥근 고리를 만들어 줬다. 고리를 뜻하는 한자 환(環)은 ‘돌아오다’는 뜻의 환(還)과 발음이 같으므로 빨리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작별인사였다.
우리 고전문학에서도 이별의 장소엔 버드나무가 있다. 헤어지는 연인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는 모습도 비슷하다. 조선 시대 기생 홍랑(洪娘)은 당대 문장가 최경창(崔慶昌)과 이별하며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라는 시조로 아픔을 달랬다.
서양 문화에서는 버드나무가 여성성과 사랑을 상징하는 나무로 자주 등장한다. 슬라브 문화에서는 봄의 시작을 축하하는 전통 행사 때 버드나무로 만든 인형이나 장식품을 활용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노르딕 신화에서는 버드나무가 보호와 의료의 특성을 가진 나무로 쓰였다.
의약계에서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치유의 나무’로 통한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진통·해열제인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의 주성분은 버드나무 가지에 들어 있는 쓴맛이다. 서양 의학의 선구자 히포크라테스는 임산부가 통증을 호소하면 버들잎을 씹으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후 수천 년간 민간요법으로 쓰던 것을 1899년 독일 바이엘 제약사 연구원 펠릭스 호프만이 상용화한 게 지금의 아스피린이다.
국내 제약업계 매출 1위 회사인 유한양행의 로고도 버드나무다. 창립자 유일한이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서재필의 딸이 지금의 로고를 그려 줬다고 한다. 이 로고는 약 100년이 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쑤시개·양치질의 어원 '양지'
양치질의 어원도 버드나무와 관련이 있다. 고려 시대 문헌 <계림유사>에 따르면 양치질의 어원은 버드나무 가지를 뜻하는 양지(楊枝)다. 당시 버드나무 가지를 잘게 으깬 후 솔처럼 만들어 이 사이를 쓸어냈다. 일본어로 ‘요지’라고 부르는 이것으로 이 사이를 후비면 이쑤시개, 끝을 씹거나 뭉개서 이 자체를 비비면 칫솔이었다.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치통을 앓는 사람에게 버드나무 껍질을 달여서 입에 넣고 양치한 뒤 뱉어내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버드나무 잎과 껍질에 통증을 줄여주는 물질이 있다”며 해열 진통제로 사용했고, 기원전 6세기에 버드나무로 이쑤시개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현대 의학 논문에도 버드나무의 항염, 진통, 구강 치료 효능이 크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봄이 오면 버드나무꽃이 활짝 핀다. 이 꽃이 강아지처럼 보들보들하게 생겨 ‘버들강아지’ ‘버들개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갯버들의 꽃을 ‘버들고양이’(ねこやなぎ·네코 야나기)라고 한다. 만주 지역에서는 물과 생명의 상징인 버드나무를 숭배했다. 여기에서 ‘유화(柳花·버들꽃) 부인’ 설화가 탄생했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쉽다. 가지를 꺾어 땅에 꽂아만 둬도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틔운다. 물에 녹아 있는 질소와 인산을 흡수해 물을 깨끗이 하는 정화 능력까지 있다. 그래서 우물가에 많이 심는다. ‘우물가 설화’에 버들잎이 단골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봄부터 초겨울까지 푸른 옷을 입고 서 있는 버드나무. 그 싱싱한 자태로 오랫동안 인류 문화사에 다채로운 채색을 하며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나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의약계 인재들에게 신약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구비전승 설화에 현대적인 콘텐츠를 입히며, 문학과 미술, 영화와 게임에도 새로운 아이템을 건네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