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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정보 습득을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감각은 시각이다. 시각의 비중은 전체 감각 기관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서양의 근대적 이성주의, 합리주의는 객체를 주체의 시선이 미치는 공간에 위치시키고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보다’, ‘보이다’라는 뜻의 영단어 ‘see’가 “I see”라는 문장이 될 때 “알겠어”라는 의미로 쓰이듯 보는 것은 아는 것이고, 볼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무지가 된다.

지난 8월 개막한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이렇듯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감각인 시각을 태생적으로 갖지 못한,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빛이 어떻게 빛나는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의 갈망과 불안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 상, 국립문학상 등을 수상한 거장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1946년 작 동명의 희곡을 성종완이 각색 및 연출, 김은영이 작곡 및 음악감독을 맡아 세계 최초로 뮤지컬로 재탄생시켰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맹인학교에 모여 사는 카를로스와 후아나 등 시각장애인들은 지팡이도 없이 편안하고 즐겁게, 장애를 잊기라도 한 듯 자신 있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교내에서 유일하게 앞을 보는, 도냐 페피따가 가르치는 ‘철의 정신’을 규율로 받아들인 그들에게 학교는 세상의 전부요, 즐겁고 평온한 안식처와 같다.

그러나 별빛을 상상하고 동경하며, “불쌍한 장님”이라 자칭하고, 지팡이를 놓지 않으려는 이그나시오가 전학 오면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학생들의 신념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즐거웠던 일상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급기야 ‘철의 정신’을 대표하는 카를로스가 도냐 페피따의 지시에 따라 이그나시오와 맞서지만, 학생들이 점차 이그나시오를 신봉하게 되면서 극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원작과 달리 돈 파블로 등 불필요한 인물을 삭제하고, 육체적인 관계가 포함된 사랑이 이그나시오의 악한 영향력을 치유할 것이라는 것과, 그에게 애인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대사 등 자칫 현대적 관점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설정을 약화시킨 연출 및 각색 의도가 적절했다.

이 작품은 시각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그들 스스로의 관점에서 풀어나가기에 핍진성 있고 흥미롭다. 장애인을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보살펴야 한다거나, 그들의 삶과 고통을 관객의 감동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신파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행복, 진실과 정의,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관객을 집요하게 끌어들인다.

성종완 연출은 원작 희곡에서라면 유추 가능한 것들도 모호하게 표현하며 관객의 예민한 주의와 판단을 요구한다. 연극적 상상력이 필요한 지점이다. 특히 1막에서는 이그나시오, 2막에서는 까를로스에게 번갈아 감정이입하게 되는 구조는 이를 더욱 강화한다.

도냐 페피따의 ‘철의 정신’은 부정적인 태도와 언행은 지양하되, 의지와 정신으로 몸의 한계를 극복할 것을 지향한다. 이 같은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신뢰는 주자학에 기반을 둔 동양철학이나 ‘하면 된다!’와 같은 슬로건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그나시오가 등장해서 “우린 결국 장님이니까”를 부르는 순간 관객들은 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바깥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외치지만, 이그나시오의 지적처럼 바깥의 현실은 분명 낭만적이지 않으니까. 학교 바깥에서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그저 남들에게 보임 당할 뿐인 그들은 앎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가 되기에, 결국 권력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을 관객은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관객의 의문은 ‘그래서, 과연 저들에게 자유와 행복은 무엇일까?’로 흐른다. 이그나시오에게 자유와 행복이란 실명의 고통을 인정하고 변화하려는 데 있으나, 카를로스에게 그것은 맹인학교의 규율과 시스템의 유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양자 간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전자가 진보주의라면 후자는 보수주의에 가까우며 역사는 늘 진보와 보수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통해 형성되어왔기 때문이다.

실명의 실존적 고통에 직면한 주인공이 이에 맞서 세상과 충돌해 부서진다는 점에서 작품은 분명 비극이다. 하지만 이그나시오와 카를로스가 결국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희망의 끊을 놓지 않는다. 비관적이기만 했던 이그나시오도 결국 사람과 사랑, 희망의 즐거움을 찾고, 카를로스에게 “별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같이 갈래?”라고 묻는다.

이그나시오 축출에 앞장섰던 카를로스는 대미에서 그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별빛을 상상하며 밤하늘을 향해 나아간다. 극 초반 카를로스는 깔끔하고 정갈한 복장, 이그나시오는 셔츠를 내놓고 넥타이도 느슨하게 푼 흐트러진 복장이다. 하지만 커튼콜에서는 카를로스가 흐트러져 있고 이그나시오는 정갈하다. 밝은 미래가 잉태되는 순간이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원작을 그만큼 빼어난 뮤지컬로 재탄생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연출 및 각색의 의도를 그대로 살린 김은영 작곡가 겸 음악감독의 힘이 컸다. '이지 리스닝'한 킬링 넘버에 천착하기보다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결합한 뮤지컬 음악의 본질에 심혈을 기울였다. 1막 초반, 학교에서 지팡이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 학생들과 달리 틱탁 지팡이 소리 내며 이그나시오가 등장했을 때 부르는 ‘누구야?’는 단연 작품의 시그니처 넘버다. 아웃복서의 풋워크처럼 하이 햇 위주로 날카롭게 치고 빠지는 변박의 드럼 연주는 지팡이 소리와 어우러져 학생들의 불안감을 날것 그대로 표현하고, 인파이터 복서의 어퍼컷처럼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베이스 기타의 묵중한 라인은 관객의 심장을 정조준한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변화무쌍한 박자와 폴리리듬은 무엇이 진실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철의 정신’은 4분의 6박자로 흐르다 5박으로 변하고 이내 6박과 5박이 합쳐져 4분의 11박이 된다. 이그나시오가 학생들 앞에서 갑자기 숨어버리는 ‘모두 장님이니까’는 8분의 6박자이지만 4박자로도 들리며 관객을 무대 위 술래잡기로 초대한다.

상황에 맞게 다채로운 분위기와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려는 노력도 인상적이다. ‘진심 어린 우정’은 시티 팝처럼 청량감 넘치는 기타 연주로 후아나의 긍정적이면서 따뜻한 캐릭터를 보여주다가, 엘리사가 노래할 때는 건반의 오른손 아르페지오와 드럼 킥으로 그녀의 불안감을 극대화한다. 학교를 떠나려는 이그나시오를 후아나가 붙잡는 듀엣 ‘안녕’은 이그나시오의 테마라 할 수 있는 ‘누구야?’의 모티브 위에 베이스 기타 선율이 올라타 움직이며 두 사람의 만남이 향후 야기할 변화를 기이한 불안감으로 암시한다. 기타의 뮤트 주법은 초조함과 긴박감을 유발하고 시한폭탄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기타와 베이스 기타가 유니즌으로 3연음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결투’ 역시 압권이다.

신선호의 안무도 높이 살만하다. 이그나시오가 학교에 남기로 결정한 뒤 학생들 사이에 연결된 끈이 사라지고 그들의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스테이징과 안무로 표현했다. 흰 지팡이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것은 맹인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상징하며, 이는 다시 맹인에게 자유를 지탱하는 힘이자 감각이 된다. 2막 초반 이그나시오를 따라 학생들이 지팡이를 짚고 등장했을 때의 안무에서, 신선호는 지팡이를 인간 감각의 연장선상에 있듯 섬세하고 부드럽게 사용하는데, 간결한 안무가 큰 규모의 프로덕션 넘버와 어우러져 오히려 더욱 강력한 2막 오프닝을 선사한다.

맹인학교를 표현한 무대는 전체적으로 그레이 톤이며 직선적이다. 미니멀한 단 세트 무대는 빛으로 줄을 긋듯 움직이는 무빙라이트와 바닥과 벽을 둘러싼 전식이 보완했다. 특히 카를로스가 이그나시오와 맞설 것을 선언하는 ‘싸워야 해’에서 전식은 무대 바닥을 파란색 사각의 링처럼 보이게 하고, 이어서 이그나시오의 영향으로 미겔린이 ‘앞을 보는 것’을 노래할 때 그 링은 붉은색으로 바뀌어 두 세력의 결투가 이끌 파국을 강하게 암시한다.

무대 뒷벽 전체를 사용하는 영상은 점자로 디자인되어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나 별빛, ‘철의 정신’의 문구 등으로 표현되어 콘셉트의 통일성을 더했다. 단, 해상도와 조도가 다소 떨어져 보다 선명하고 밝았다면 좋았을 장면, 예를 들어 극의 대미에 카를로스가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이나 이그나시오와 학생들이 ‘빛, 볼 수 있다면’을 부르며 빛을 열망하는 장면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였다.

특히 이 넘버 중간에 어둠에 갇힌 시각장애인들의 끔찍한 고통을 담아내기 위해 무대와 객석 전체가 얼마간 암전 되는데, 그 직전의 조도가 밝았다면 훨씬 더 강렬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창작 초연의 예산 편성을 감안할 때 이해가 가는, 재연부터가 더 기대되는 지점이다.

러닝 타임 내내 쉽지 않은 화두를 던지면서도 관객의 서스펜스를 떨어뜨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이 지금 여기 우리의 내면에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는 불평등, 사회적 차별, 권력과 계급의 부조리로 들린다. 관객은 결말까지 손에 땀을 쥐고 공연을 관람할 수밖에 없다.

도냐 페피따를 제외한 모든 배우가 시각장애인 역할인 만큼, 관객은 말 그대로 제4의 벽 너머에서 배우들을 엿보는 관음의 즐거움을 극도로 맛본다. 관찰자로서 존재하는 관객은 끊임없이 정의란, 진실이란, 행복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나라면 어땠을까 자문하게 된다. 하지만 카를로스가 후아나를 찾으며 부를 때, 이그나시오의 손에 입이 가려진 후아나가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관찰자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모종의 공모자가 되어 작품에 빠져든다. 이 공모자의 지위는 극의 후반부 같은 장소에서 반대로 후아나가 이그나시오를 부르며 지나갈 때, 엘리사와 있던 카를로스가 숨어버림으로써 극 전반에 걸쳐 유지된다.

이는 실제 시각장애인의 시선과 시력을 표현하려 한 배우들의 노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핍진성을 위해 안압이 오르는 것을 마다않고 매 공연 쉽지 않은 연기를 해내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연습실에서 실제 앞을 보지 않고 움직이는 고된 훈련을 하고도 막상 공연장의 어두운 환경에서 또 한 번 고전했다던 배우들의 투혼이 실제 공연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던, 그래서 공연 자체가 아름다웠던, 하나의 빛이었던, 결국 어둠마저 타오르게 했던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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