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한지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킨 여자, 이현정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인터뷰] 파리에서 활동하는 이현정 작가
미대 졸업 후 1995년 파리로 넘어가
보석 디자인하다 그림에 대한 갈증으로
마흔 한 살 때 회사 그만두고 붓 들어
"내 그림은 '길'에 대한 것...돌고 돌아도 괜찮아"
미대 졸업 후 1995년 파리로 넘어가
보석 디자인하다 그림에 대한 갈증으로
마흔 한 살 때 회사 그만두고 붓 들어
"내 그림은 '길'에 대한 것...돌고 돌아도 괜찮아"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고민이 있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1995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이현정 작가(51)는 다름아닌 '한지'에서 그 답을 찾았다. 닥나무 종이를 수시간씩 삶고 찐 후 얇게 펴서 만든 가장 한국적인 재료, 한지. 이 작가는 그 위에 세필로 섬세하게 선을 그려낸다.
그는 이런 작품으로 요즘 여러 아트페어에서 주목받고 있다. 1월 아트SG, 4월 화랑미술제, 5월 아트부산, 7월 도쿄겐다이, 9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 작품이 모두 '완판'됐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아시아 나우'에서도 그의 작품은 인기였다. 궁금했다. 페어장에서 오고 가며 본 이 아름다운 작품 뒤에 어떤 얘기가 숨어있을지. 최근 파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파란색 문을 두드리자, 거실 옆 작은 작업실에서 한창 작업 중이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나왔다.
'어떻게 작품을 시작했는지'를 묻자, 그는 "잠깐만요" 하더니 작은 상자를 갖고 왔다. 은과 진주로 만든 브로치와 목걸이였다. "한국에서 미대를 나온 후 무작정 파리로 왔어요.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게 보석 디자인이었죠. 보석 회사에 들어가서 디자이너로 수년간 일했어요. 거기서 전시도 열고, 나름 인정받았어요. 하하."
돌고 돌아 그림이었다. 보석 공예도 즐거웠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엔 그림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거기에 불을 붙힌 건 2013년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보석 공예 전시였다. "집에서 혼자 그린 작은 그림을 보석 작품 옆에 걸어뒀는데, 여성 세 분이 오더니 그림을 사겠다고 하더라고요. 내 그림도 팔릴 수 있구나. 그 때 용기를 얻었어요." 결국 이 작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붓을 들었다. 마흔 한 살 때의 일이다. 그의 작업은 꽤나 수고스럽다. 먼저 한지를 따뜻한 물에 풀어서 나무 판에 얇게 핀다. 손으로 꾹꾹 누르기도 하고, 발로 밟기도 한다. 이 작가는 "한지를 주물럭거리면서 한국을 떠올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고 했다. 배경이 완성되면 그 위에 수십 시간을 들여 세필로 하나하나 선을 그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거대한 파도 같기도, 산 같기도 하다. 해석은 관람객 몫이라지만, 그가 처음에 마음 속에 떠올린 건 '길'이었다고 했다. 그가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며 걸어온 길, 그러다 용기를 얻고 마침내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인생의 길이다. '늦깎이 데뷔'였지만, 동양적이면서도 세련된 작품에 많은 갤러리들이 '러브콜'을 보냈다. 벌써 프랑스 벨기에 독일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등 5개 갤러리와 일하고 있다. 오는 28일 경기 판교 더컬럼스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이 끝나면, 내년 초 싱가포르에서 개인전도 연다.
"제 작품이 사랑받는 건 제가 돌고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20대 때 바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면 제 그림은 굉장히 설익었을 거예요. 늦게 시작했지만, 그만큼 긴 고민 끝에 그린 그림이기에 인생이 묻어있거든요." 파리=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1995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이현정 작가(51)는 다름아닌 '한지'에서 그 답을 찾았다. 닥나무 종이를 수시간씩 삶고 찐 후 얇게 펴서 만든 가장 한국적인 재료, 한지. 이 작가는 그 위에 세필로 섬세하게 선을 그려낸다.
그는 이런 작품으로 요즘 여러 아트페어에서 주목받고 있다. 1월 아트SG, 4월 화랑미술제, 5월 아트부산, 7월 도쿄겐다이, 9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 작품이 모두 '완판'됐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아시아 나우'에서도 그의 작품은 인기였다. 궁금했다. 페어장에서 오고 가며 본 이 아름다운 작품 뒤에 어떤 얘기가 숨어있을지. 최근 파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파란색 문을 두드리자, 거실 옆 작은 작업실에서 한창 작업 중이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나왔다.
'어떻게 작품을 시작했는지'를 묻자, 그는 "잠깐만요" 하더니 작은 상자를 갖고 왔다. 은과 진주로 만든 브로치와 목걸이였다. "한국에서 미대를 나온 후 무작정 파리로 왔어요.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게 보석 디자인이었죠. 보석 회사에 들어가서 디자이너로 수년간 일했어요. 거기서 전시도 열고, 나름 인정받았어요. 하하."
돌고 돌아 그림이었다. 보석 공예도 즐거웠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엔 그림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거기에 불을 붙힌 건 2013년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보석 공예 전시였다. "집에서 혼자 그린 작은 그림을 보석 작품 옆에 걸어뒀는데, 여성 세 분이 오더니 그림을 사겠다고 하더라고요. 내 그림도 팔릴 수 있구나. 그 때 용기를 얻었어요." 결국 이 작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붓을 들었다. 마흔 한 살 때의 일이다. 그의 작업은 꽤나 수고스럽다. 먼저 한지를 따뜻한 물에 풀어서 나무 판에 얇게 핀다. 손으로 꾹꾹 누르기도 하고, 발로 밟기도 한다. 이 작가는 "한지를 주물럭거리면서 한국을 떠올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고 했다. 배경이 완성되면 그 위에 수십 시간을 들여 세필로 하나하나 선을 그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거대한 파도 같기도, 산 같기도 하다. 해석은 관람객 몫이라지만, 그가 처음에 마음 속에 떠올린 건 '길'이었다고 했다. 그가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며 걸어온 길, 그러다 용기를 얻고 마침내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인생의 길이다. '늦깎이 데뷔'였지만, 동양적이면서도 세련된 작품에 많은 갤러리들이 '러브콜'을 보냈다. 벌써 프랑스 벨기에 독일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등 5개 갤러리와 일하고 있다. 오는 28일 경기 판교 더컬럼스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이 끝나면, 내년 초 싱가포르에서 개인전도 연다.
"제 작품이 사랑받는 건 제가 돌고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20대 때 바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면 제 그림은 굉장히 설익었을 거예요. 늦게 시작했지만, 그만큼 긴 고민 끝에 그린 그림이기에 인생이 묻어있거든요." 파리=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