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악 분쟁지역은 중동 아닌 동유럽…그 이유는? [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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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사
존 코넬리 지음
허승철 옮김/책과함께
1412쪽|6만5000원
존 코넬리 지음
허승철 옮김/책과함께
1412쪽|6만5000원
중동이 다시 ‘세계의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다. 2011년 이후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잇달아 내전이 일어난 데 이어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뿌리 깊은 분쟁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
하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세계 최악의 분쟁 지역은 동유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이다. 1990년대에도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코소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동유럽사>는 이 동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한 과정을 다룬다. 18세기 후반부터 오늘날까지 동유럽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존 코넬리 미국 버클리대 유럽사 교수가 썼다. 원제는 ‘민족에서 국가로: 동유럽의 역사’다. 중동처럼 동유럽도 분쟁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을 가졌다. 대륙의 끝자락이 아닌 통로에 위치했다. 다양한 문화, 언어, 종교를 가진 민족이 섞여 살았다. 국경이 자주 바뀌었다. 같은 유럽이지만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민족주의 분쟁이 잘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는 왕국이었다가 공화국이 되기는 했지만 아무도 프랑스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지는 않았다. 프랑스는 수 세기 동안 조금밖에 변경되지 않은 국경 안에 있었고,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유럽 지도의 확고한 사실이었다. 영국, 러시아,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동유럽에서 민족주의가 힘을 얻은 때를 1780년대로 본다. 동유럽 일대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요제프 2세가 독일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선언하면서다. 통일된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는 역효과를 냈다. 예부터 지역 간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치를 허용했던 제국의 전통과 달랐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 헝가리인, 체코인 등 여러 민족이 반발했다. 민족주의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2등 국민’이란 열등감과 자기 민족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과격한 민족주의로 흐른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그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이다. 그의 부모는 시골의 소작농이었다. 힘든 삶을 살았다. 프린치프에겐 9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이 중 5명이 어려서 사망했다. 프린치프는 자신이 황태자에게 쏜 총알을 정당화했다. 불공정과 압제를 없애기 위한 행동이라 믿었다. 사정은 그보다 복잡했다. 암살당한 황태자는 포용주의를 내세웠다. 남슬라브만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프린치프 같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겐 악재였다. 슬라브계 민족이 제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순진했다. 자기네 나라만 세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봤다.
“그(프린치프)와 그의 친구들은 남슬라브 국가가 모든 불공정을 기적처럼 없앨 것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 국가는 그의 부모와 다른 농민들이 더 이상 하층민으로 멸시받지 않고, 당당히 인간으로서 오스만튀르크건, 오스트리아-독일이건, 헝가리건을 떠나서 더 이상 제국 당국의 모멸적인 시선 아래 살 필요가 없는 장소가 될 터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가 꽃피는 곳, 모두가 자신들이 사랑하는 고대 세르비아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는 곳에서 완전히 존경받으며 살게 될 터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유럽 민족주의자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정치학자 출신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 자결의 원칙’을 내세운 덕에 수많은 민족이 독립을 이뤘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가 이렇게 세워졌다.
그래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살던 ‘민족들’을 지역에 따라 나누는 건 쉽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는 ‘미니 합스부르크 제국’이었다. 즉, 신생 국가 안에도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다. ‘화합’ 대신 ‘자기 민족끼리’를 내세운 탓에 갈등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이와 관련한 분쟁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민자 국가’ 미국이 예외로 꼽히지만, 미국도 200년의 역사가 쌓여 점점 더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이 커지고 있다. ‘단일 민족 국가’ 한국도 이제는 남 일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쉬운 책은 아니다. 1400여 쪽에 이른다. 수많은 이름과 디테일 속에 길을 잃기 쉽다. 대신 그 속에 타산지석이 될 이야기가 담겼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하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세계 최악의 분쟁 지역은 동유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이다. 1990년대에도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코소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동유럽사>는 이 동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한 과정을 다룬다. 18세기 후반부터 오늘날까지 동유럽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존 코넬리 미국 버클리대 유럽사 교수가 썼다. 원제는 ‘민족에서 국가로: 동유럽의 역사’다. 중동처럼 동유럽도 분쟁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을 가졌다. 대륙의 끝자락이 아닌 통로에 위치했다. 다양한 문화, 언어, 종교를 가진 민족이 섞여 살았다. 국경이 자주 바뀌었다. 같은 유럽이지만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민족주의 분쟁이 잘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는 왕국이었다가 공화국이 되기는 했지만 아무도 프랑스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지는 않았다. 프랑스는 수 세기 동안 조금밖에 변경되지 않은 국경 안에 있었고,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유럽 지도의 확고한 사실이었다. 영국, 러시아,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동유럽에서 민족주의가 힘을 얻은 때를 1780년대로 본다. 동유럽 일대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요제프 2세가 독일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선언하면서다. 통일된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는 역효과를 냈다. 예부터 지역 간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치를 허용했던 제국의 전통과 달랐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 헝가리인, 체코인 등 여러 민족이 반발했다. 민족주의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2등 국민’이란 열등감과 자기 민족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과격한 민족주의로 흐른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그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이다. 그의 부모는 시골의 소작농이었다. 힘든 삶을 살았다. 프린치프에겐 9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이 중 5명이 어려서 사망했다. 프린치프는 자신이 황태자에게 쏜 총알을 정당화했다. 불공정과 압제를 없애기 위한 행동이라 믿었다. 사정은 그보다 복잡했다. 암살당한 황태자는 포용주의를 내세웠다. 남슬라브만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프린치프 같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겐 악재였다. 슬라브계 민족이 제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순진했다. 자기네 나라만 세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봤다.
“그(프린치프)와 그의 친구들은 남슬라브 국가가 모든 불공정을 기적처럼 없앨 것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 국가는 그의 부모와 다른 농민들이 더 이상 하층민으로 멸시받지 않고, 당당히 인간으로서 오스만튀르크건, 오스트리아-독일이건, 헝가리건을 떠나서 더 이상 제국 당국의 모멸적인 시선 아래 살 필요가 없는 장소가 될 터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가 꽃피는 곳, 모두가 자신들이 사랑하는 고대 세르비아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는 곳에서 완전히 존경받으며 살게 될 터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유럽 민족주의자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정치학자 출신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 자결의 원칙’을 내세운 덕에 수많은 민족이 독립을 이뤘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가 이렇게 세워졌다.
그래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살던 ‘민족들’을 지역에 따라 나누는 건 쉽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는 ‘미니 합스부르크 제국’이었다. 즉, 신생 국가 안에도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다. ‘화합’ 대신 ‘자기 민족끼리’를 내세운 탓에 갈등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이와 관련한 분쟁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민자 국가’ 미국이 예외로 꼽히지만, 미국도 200년의 역사가 쌓여 점점 더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이 커지고 있다. ‘단일 민족 국가’ 한국도 이제는 남 일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쉬운 책은 아니다. 1400여 쪽에 이른다. 수많은 이름과 디테일 속에 길을 잃기 쉽다. 대신 그 속에 타산지석이 될 이야기가 담겼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