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 스텝' 끝 필라델피아 미술관, 비누로 '동양의 신' 세운 한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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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한빛의 아메리칸 아트 살롱
지난 20일 개막한 <시간의 형태:1989년 이후 한국 미술>
지난 20일 개막한 <시간의 형태:1989년 이후 한국 미술>
미국 7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필라델피아미술관은 그 방대한 컬렉션보다 미술관을 향하는 ‘계단’이 더 유명합니다. 이름하여 록키 스텝. (흥행에 힘입어 5편까지 제작된)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이 날마다 그 계단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는 장면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에 남았을 테니까요. 주인공 록키를 형상화한 조각은 계단의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습니다만, 날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진을 찍는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꿈을 좇았던 록키처럼 말이죠.
오늘 글의 주인공은 (안타깝게도) 록키가 아닌 필라델피아미술관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서면 마침내 미술관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스타일의 고전적 건물인데, 첫 인상에도 잘 생겼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주름진 기둥 위 삼각모양의 박공(페디먼트)이 자리한 전형적인 신전 형상의 이 건물은 ‘ㄷ’자 형태로 계단 위 펼쳐진 광장을 둘러싸고 있지요. 실제로 1917년 첫 도안이 선택된 이래 1928년 완공됐고, 당시 건축비만 1200만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천문학적 예산의 힘이었을까요? 개관 첫 해에만 100만명이 찾았습니다. 록키가 아니었어도 인기 만점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건물은 미완입니다.
어쩌다 빈 벽으로 남았을까
심지어 미완성인 부분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바로 페디먼트입니다. 광장에 서서 메인 빌딩을 기준으로 오른쪽 윙의 페디먼트엔 컬러풀한 조각상이 설치돼 있습니다. 그리스 신들과 신화적 인물을 한 자리에 모은 이 작품은 ‘Western Civilization’(1933). C. Paul Jennewein(1890-1978)의 작품입니다. 반면 왼쪽 윙의 페디먼트는 빈 채로, 벽돌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인데 무슨 연유로 한쪽만 완성되고 다른쪽은 아무것도 없는 빈 벽이 되었을까요? 원래대로라면 왼쪽 윙의 페디먼트엔 동양의 신과 신화적 존재들이 자리잡았어야 했습니다. 조각가였던 존 그레고리(1879–1958)에게 떨어진 미션이었죠. 1926년 작가는 ‘Eastern Civilization’이라는 이름으로 모케트(모형·maquettes)도 만들었는데, 끝내 완성작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모케트는 긴 시간 미술관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왜 완성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Western Civilization에 비해 참고할만한 신화 자료가 부족했고, 또한 작가도 문화적 고정관념으로 제약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레고리는 실제로 자신의 모케트가 다소 생동감이 없는 것은 아시아 문화가 반영된 것이라면서 “시간의 흐름은 동양인 정신세계에선 큰 고려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서양문명의 특징인 에너지와 생동감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Western Civilization은 ‘인간의 의지와 창조적 파워’를 상징하는 제우스(Zeus)가 정 중앙에 자리잡고 그 옆에 희생적 사랑을 상징하며 농업의 신인 세레스(Ceres)가 자리했습니다. 세레스의 손을 잡고 있는 트리프톨레모스는(Triptolemus) 농업과 문화의 전파자입니다. 외에도 다프네, 아프로디테, 에로스까지 인간의 정신과 인간세계를 이루는 물질을 고루 담아냈습니다.
이처럼 동시에 커미션 받아 연구도 함께하며 진도를 쭉쭉 뽑았던 Jennewein에 비하면 사실 그레고리의 작업은 엉성한 부분이 보입니다. 그도 마찬가지로 (그가 생각할 때) 동양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정신과 인간세계의 물질을 관장하는 신(위인)들을 펼쳐 놓는데, 가운데는 ‘생명, 철학, 종교의 근원’인 인도(India)의 현신이 그 옆에는 이집트와 바빌론이 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인화 한 것입니다. 부처, 술탄, 솔로몬, 세헤라자데(1001밤의)가 나란히 섰습니다. 짐작이긴 하지만, 작가 스스로도 별로 성에 차지 않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양 문명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 작가 내면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최종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은 것 아닐까요? 한국작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Eastern Civilization
끝내 미완으로 남아, 그 존재조차 희미해진 Eastern Civilization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바로 한국작가 신미경(56)의 손 에서요.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지난 20일 개막한 <시간의 형태:1989년 이후 한국 미술>의 미술관 커미션 작업입니다. 신미경 작가는 원작 모케트를 기반으로 존 그레고리의 작업을 소환합니다. 작품 제목도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Eastern Deities Descended)입니다. 13인의 인물 중에서 작가는 총 3인(인도, 이사야, 크세르크세스)을 선정했습니다. 인도는 모든 것의 근원을, 이사야는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이고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의 왕으로 인도에서부터 에티오피아까지 광활한 제국을 통치한 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복의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작품은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쪽 야외 테라스에 놓였습니다. 작품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기 전 익숙한 향기가 관객을 맞이합니다. 비누조각으로 유명한 신미경작가는 이번에도 비누로 Eastern Civilization을 변환합니다. 보석 호박처럼도 보이는 이 작업의 원료는 바로 뉴트리지나 비누입니다. 비누로 조각한 동양의 신들
왜 (돌로 만들어도 부족할!)조각상을 비누로 만들었을까요? 커미션을 제안한 유현수 필라델피아미술관 부관장은 “비누라는 일상적이고도 일시적인 소재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며, 문화적 요소들의 재맥락에 대해 질문한다”고 설명합니다. 영원 불멸을 바라고 대리석을 쪼아 만들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훼손되고 사라진다는 것을 매일 매일 물에 닿아 조금씩 사라지는 비누가 웅변하는 셈이죠. 또한 동양 문화가 이곳 미국까지 번역에 번역을 더해 전달되면서 맥락이 사라지고 더해지면서 그래도 살아남은 소통의 가능성, 이해, 의미의 상실도 무언가를 씼어내는 비누와 은유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바람에, 햇볕에, 공기에, 비에 노출된 비누는 생각보다 오래 간다는 겁니다. 2012년 런던 캐번디시 광장에서 제거된 돌 기념비를 대체해 비누로 제작한 ‘Written in Soap: Plinth Project’는 1년 넘도록 그 형태가 무너지지 않았고, 철거 이후 지금까지도 미술관에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시간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도 비누라는 재료의 특징입니다. 코리아나미술관 20주년 기념전(2023년 2월)으로 개최된 신미경 개인전에서 실제 코리아나화장박물관의 유물과 작가의 비누로 제작한 유물 시리즈가 나란히 놓였는데,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풍화된 비누인지 아니면 진짜 유물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렇듯 신미경 작가는 비누라는 매체로 우리는 무한한 시간과 유한한 존재인 인류의 이야기를 더듬습니다. 그 사이 잊혀지고 지워진 이야기들도 끌어내면서요. 1989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번 전시는 신미경작가 외에도 서도호, 박찬경, 정연두, 강서경, 이수경, 임민욱, 김주리, 함경아 등 28명의 한국작가 혹은 한국계 작가가 참여합니다. 동시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세계인의 공감대를 자극합니다. 이념전쟁의 상처, 세대간 갈등,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젠트리피케이션, 겉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지만 차별적 시선을 내재화한 우리의 자화상은 비단 한국의 현재만이 아닙니다. 복잡 다단한 의미의 층위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한국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전시를 기획한 유현수 부관장은 제목의 1989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울올림픽 이후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다. 이를 기점으로 문화가 바뀌었다. (이 세대는)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을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한 마지막 세대이자, 새로운 민주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세대로 이중 상당수가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했다. 지금의 K컬쳐에 이르기까지, 그 기반이 이때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필라델피아뮤지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전시장이 윌리엄스 포럼입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에 이르는 높은 층고를 자랑하는 개방된 공간인데, 이곳엔 서도호작가의 ‘서울 집/ 서울 집/ 가나자와 집/ 베이징 집/ 포항 집/ 광주 집/ 필라델피아 집’이 설치됐습니다. 공중에 띄운 형태의 집은 관객들이 그 아래를 지나다니며 작가가 거쳐간 집들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합니다. 서도호의 집 아래에는 하지훈의 ‘자리’가 펼쳐집니다. 관객들은 그 위에 앉거나 누워서 서도호의 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국적 특징을 간직하면서도 세계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한국 근대 화단의 가장 큰 화두가 근 한 세기가 지나서 나름의 답안을 찾아낸 듯 합니다. 적어도 이곳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제안하는 한국 현대미술은 그렇습니다. 전시는 24년 2월 11일까지.
오늘 글의 주인공은 (안타깝게도) 록키가 아닌 필라델피아미술관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서면 마침내 미술관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스타일의 고전적 건물인데, 첫 인상에도 잘 생겼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주름진 기둥 위 삼각모양의 박공(페디먼트)이 자리한 전형적인 신전 형상의 이 건물은 ‘ㄷ’자 형태로 계단 위 펼쳐진 광장을 둘러싸고 있지요. 실제로 1917년 첫 도안이 선택된 이래 1928년 완공됐고, 당시 건축비만 1200만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천문학적 예산의 힘이었을까요? 개관 첫 해에만 100만명이 찾았습니다. 록키가 아니었어도 인기 만점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건물은 미완입니다.
어쩌다 빈 벽으로 남았을까
심지어 미완성인 부분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바로 페디먼트입니다. 광장에 서서 메인 빌딩을 기준으로 오른쪽 윙의 페디먼트엔 컬러풀한 조각상이 설치돼 있습니다. 그리스 신들과 신화적 인물을 한 자리에 모은 이 작품은 ‘Western Civilization’(1933). C. Paul Jennewein(1890-1978)의 작품입니다. 반면 왼쪽 윙의 페디먼트는 빈 채로, 벽돌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인데 무슨 연유로 한쪽만 완성되고 다른쪽은 아무것도 없는 빈 벽이 되었을까요? 원래대로라면 왼쪽 윙의 페디먼트엔 동양의 신과 신화적 존재들이 자리잡았어야 했습니다. 조각가였던 존 그레고리(1879–1958)에게 떨어진 미션이었죠. 1926년 작가는 ‘Eastern Civilization’이라는 이름으로 모케트(모형·maquettes)도 만들었는데, 끝내 완성작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모케트는 긴 시간 미술관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왜 완성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Western Civilization에 비해 참고할만한 신화 자료가 부족했고, 또한 작가도 문화적 고정관념으로 제약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레고리는 실제로 자신의 모케트가 다소 생동감이 없는 것은 아시아 문화가 반영된 것이라면서 “시간의 흐름은 동양인 정신세계에선 큰 고려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서양문명의 특징인 에너지와 생동감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Western Civilization은 ‘인간의 의지와 창조적 파워’를 상징하는 제우스(Zeus)가 정 중앙에 자리잡고 그 옆에 희생적 사랑을 상징하며 농업의 신인 세레스(Ceres)가 자리했습니다. 세레스의 손을 잡고 있는 트리프톨레모스는(Triptolemus) 농업과 문화의 전파자입니다. 외에도 다프네, 아프로디테, 에로스까지 인간의 정신과 인간세계를 이루는 물질을 고루 담아냈습니다.
이처럼 동시에 커미션 받아 연구도 함께하며 진도를 쭉쭉 뽑았던 Jennewein에 비하면 사실 그레고리의 작업은 엉성한 부분이 보입니다. 그도 마찬가지로 (그가 생각할 때) 동양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정신과 인간세계의 물질을 관장하는 신(위인)들을 펼쳐 놓는데, 가운데는 ‘생명, 철학, 종교의 근원’인 인도(India)의 현신이 그 옆에는 이집트와 바빌론이 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인화 한 것입니다. 부처, 술탄, 솔로몬, 세헤라자데(1001밤의)가 나란히 섰습니다. 짐작이긴 하지만, 작가 스스로도 별로 성에 차지 않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양 문명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 작가 내면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최종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은 것 아닐까요? 한국작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Eastern Civilization
끝내 미완으로 남아, 그 존재조차 희미해진 Eastern Civilization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바로 한국작가 신미경(56)의 손 에서요.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지난 20일 개막한 <시간의 형태:1989년 이후 한국 미술>의 미술관 커미션 작업입니다. 신미경 작가는 원작 모케트를 기반으로 존 그레고리의 작업을 소환합니다. 작품 제목도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Eastern Deities Descended)입니다. 13인의 인물 중에서 작가는 총 3인(인도, 이사야, 크세르크세스)을 선정했습니다. 인도는 모든 것의 근원을, 이사야는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이고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의 왕으로 인도에서부터 에티오피아까지 광활한 제국을 통치한 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복의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작품은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쪽 야외 테라스에 놓였습니다. 작품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기 전 익숙한 향기가 관객을 맞이합니다. 비누조각으로 유명한 신미경작가는 이번에도 비누로 Eastern Civilization을 변환합니다. 보석 호박처럼도 보이는 이 작업의 원료는 바로 뉴트리지나 비누입니다. 비누로 조각한 동양의 신들
왜 (돌로 만들어도 부족할!)조각상을 비누로 만들었을까요? 커미션을 제안한 유현수 필라델피아미술관 부관장은 “비누라는 일상적이고도 일시적인 소재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며, 문화적 요소들의 재맥락에 대해 질문한다”고 설명합니다. 영원 불멸을 바라고 대리석을 쪼아 만들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훼손되고 사라진다는 것을 매일 매일 물에 닿아 조금씩 사라지는 비누가 웅변하는 셈이죠. 또한 동양 문화가 이곳 미국까지 번역에 번역을 더해 전달되면서 맥락이 사라지고 더해지면서 그래도 살아남은 소통의 가능성, 이해, 의미의 상실도 무언가를 씼어내는 비누와 은유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바람에, 햇볕에, 공기에, 비에 노출된 비누는 생각보다 오래 간다는 겁니다. 2012년 런던 캐번디시 광장에서 제거된 돌 기념비를 대체해 비누로 제작한 ‘Written in Soap: Plinth Project’는 1년 넘도록 그 형태가 무너지지 않았고, 철거 이후 지금까지도 미술관에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시간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도 비누라는 재료의 특징입니다. 코리아나미술관 20주년 기념전(2023년 2월)으로 개최된 신미경 개인전에서 실제 코리아나화장박물관의 유물과 작가의 비누로 제작한 유물 시리즈가 나란히 놓였는데,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풍화된 비누인지 아니면 진짜 유물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렇듯 신미경 작가는 비누라는 매체로 우리는 무한한 시간과 유한한 존재인 인류의 이야기를 더듬습니다. 그 사이 잊혀지고 지워진 이야기들도 끌어내면서요. 1989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번 전시는 신미경작가 외에도 서도호, 박찬경, 정연두, 강서경, 이수경, 임민욱, 김주리, 함경아 등 28명의 한국작가 혹은 한국계 작가가 참여합니다. 동시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세계인의 공감대를 자극합니다. 이념전쟁의 상처, 세대간 갈등,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젠트리피케이션, 겉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지만 차별적 시선을 내재화한 우리의 자화상은 비단 한국의 현재만이 아닙니다. 복잡 다단한 의미의 층위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한국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전시를 기획한 유현수 부관장은 제목의 1989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울올림픽 이후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다. 이를 기점으로 문화가 바뀌었다. (이 세대는)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을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한 마지막 세대이자, 새로운 민주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세대로 이중 상당수가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했다. 지금의 K컬쳐에 이르기까지, 그 기반이 이때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필라델피아뮤지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전시장이 윌리엄스 포럼입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에 이르는 높은 층고를 자랑하는 개방된 공간인데, 이곳엔 서도호작가의 ‘서울 집/ 서울 집/ 가나자와 집/ 베이징 집/ 포항 집/ 광주 집/ 필라델피아 집’이 설치됐습니다. 공중에 띄운 형태의 집은 관객들이 그 아래를 지나다니며 작가가 거쳐간 집들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합니다. 서도호의 집 아래에는 하지훈의 ‘자리’가 펼쳐집니다. 관객들은 그 위에 앉거나 누워서 서도호의 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국적 특징을 간직하면서도 세계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한국 근대 화단의 가장 큰 화두가 근 한 세기가 지나서 나름의 답안을 찾아낸 듯 합니다. 적어도 이곳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제안하는 한국 현대미술은 그렇습니다. 전시는 24년 2월 1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