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뭘 그리라고 김홍도를 베이징에 보냈을까 [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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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이 만난 문명
정재훈 지음
그물
480쪽│2만9000원
정재훈 지음
그물
480쪽│2만9000원
"김홍도를 이번에 마땅히 데리고 가야 하는데 정원에는 자리가 없습니다. 이에 김홍도를 신의군관으로 추가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정조 13년인 1789년 <일성록>의 기록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조선 후기에는 매년 네다섯 번 중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행차한다는 의미에서 '연행(燕行)'이라고 불렀다. 당시 사절단 단장 격인 이성원이 특별히 김홍도를 연행에 데려갈 것을 요청했고, 정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홍도의 공식 임무는 연행의 기록을 그림으로 남기는 일. 이 정도는 다른 평범한 화원도 수행할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자, 임금이 직접 주문한 그림을 그렸던 '특별화원' 김홍도가 왕의 특명으로 연경을 찾은 것이다. 정조는 김홍도의 붓끝을 통해 중국의 어떤 풍경을 보고 싶었을까.
<18세기 조선이 만난 문명>은 18세기 중국을 찾은 조선 사신들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당시 중국은 명이 쇠하고 청이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 잡던 시기였다. 격동하는 국제정세를 기록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등을 정재훈 경북대 사학과 교수가 엮고 해설했다. 김홍도의 중국 파견에는 화성 건설에 중국의 축성법을 참고하기 위한 정조의 의도가 반영됐다. 당대 최대의 국책사업이었던 만큼, 가장 신뢰했던 화원을 보낸 것이다. 김홍도는 '천하제일의 관문'으로 통했던 산해관을 유심히 관찰했다. 빼곡히 들어선 벽돌 성곽 앞에 있는 해자를 화폭에 담았다. 그렇게 화성은 중국 산해관의 동라문, 조양문과 유사한 형태로 지어졌다.
18세기 연행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창구였다. 명을 몰아낸 청이 새롭게 구축한 제도뿐만 아니라 연경에 유입된 서양 문화까지 조선에 소개됐다. 학술적으로도 기존 성리학 대신 북학과 고증학이 유행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활동은 19세기 조선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기초 배경이 됐다. 외국 문물이 아무 반발 없이 들어온 건 아니었다. 만주족이 세운 청을 얕잡아보고, 조선을 명의 정당한 계승자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판을 치던 시기다. 청의 문물이 다시 평가될 수 있던 것은 연행자들의 기록 덕분이었다. 홍대용 박지원 등 초기 주창자들과 이들의 뜻을 이어받은 박제가 이덕무 등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많다. 하지만 미국의 질주가 한풀 꺾이고, 중국이 매섭게 쫓아오는 현재 국제 정세에 꽤 유의미한 시사점을 준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정조 13년인 1789년 <일성록>의 기록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조선 후기에는 매년 네다섯 번 중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행차한다는 의미에서 '연행(燕行)'이라고 불렀다. 당시 사절단 단장 격인 이성원이 특별히 김홍도를 연행에 데려갈 것을 요청했고, 정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홍도의 공식 임무는 연행의 기록을 그림으로 남기는 일. 이 정도는 다른 평범한 화원도 수행할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자, 임금이 직접 주문한 그림을 그렸던 '특별화원' 김홍도가 왕의 특명으로 연경을 찾은 것이다. 정조는 김홍도의 붓끝을 통해 중국의 어떤 풍경을 보고 싶었을까.
<18세기 조선이 만난 문명>은 18세기 중국을 찾은 조선 사신들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당시 중국은 명이 쇠하고 청이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 잡던 시기였다. 격동하는 국제정세를 기록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등을 정재훈 경북대 사학과 교수가 엮고 해설했다. 김홍도의 중국 파견에는 화성 건설에 중국의 축성법을 참고하기 위한 정조의 의도가 반영됐다. 당대 최대의 국책사업이었던 만큼, 가장 신뢰했던 화원을 보낸 것이다. 김홍도는 '천하제일의 관문'으로 통했던 산해관을 유심히 관찰했다. 빼곡히 들어선 벽돌 성곽 앞에 있는 해자를 화폭에 담았다. 그렇게 화성은 중국 산해관의 동라문, 조양문과 유사한 형태로 지어졌다.
18세기 연행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창구였다. 명을 몰아낸 청이 새롭게 구축한 제도뿐만 아니라 연경에 유입된 서양 문화까지 조선에 소개됐다. 학술적으로도 기존 성리학 대신 북학과 고증학이 유행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활동은 19세기 조선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기초 배경이 됐다. 외국 문물이 아무 반발 없이 들어온 건 아니었다. 만주족이 세운 청을 얕잡아보고, 조선을 명의 정당한 계승자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판을 치던 시기다. 청의 문물이 다시 평가될 수 있던 것은 연행자들의 기록 덕분이었다. 홍대용 박지원 등 초기 주창자들과 이들의 뜻을 이어받은 박제가 이덕무 등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많다. 하지만 미국의 질주가 한풀 꺾이고, 중국이 매섭게 쫓아오는 현재 국제 정세에 꽤 유의미한 시사점을 준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