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유언장이 400억 다툼으로…태광그룹 ‘집안 싸움’ 결말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누나 재훈 씨와 상속 재산을 두고 다툰 소송 1심에서 승리했다. 남매는 아버지인 이임용 태광그룹 창업주가 27년 전 남긴 유언장까지 소환해가며 치열하게 다퉜다. 법원은 유언장은 무효라고 보면서도 이 전 회장이 실질적으로 상속받은 채권을 관리했다는 점을 근거로 이 전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비자금 수사로 드러난 차명계좌... 상속 전쟁 불씨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7부(부장판사 손승온)는 이 전 회장이 누나 재훈 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지난 6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피고는 원고에게 400억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이 상속 분쟁은 1996년 이임용 선대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비롯됐다. 이 선대 회장은 그해 9월 이호진 회장의 외삼촌인 이기화 사장을 유언집행자로 지정하고 "태광그룹의 경영에 관한 모든 일을 이 사장에게 일임하고 '나머지 재산'이 있으면 이 사장에 뜻에 따라 처리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는 "아들들과 아내에게 재산을 물려주되 세 자매에게는 별도의 재산상속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2018년 12월 12일 법정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2018년 12월 12일 법정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 선대 회장은 두 달 후인 11월 삼남 이호진 전 회장을 비롯해 자녀 다섯 명(2남 3녀)을 두고 사망했다. 유언대로 이 선대 회장의 부동산과 주식은 모두 부인인 이선애 여사와 두 아들이 받았다. 차녀인 재훈 씨를 비롯한 세 자매는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그런데 11년 후인 2007년 11월 국세청이 이 선대 회장의 상속재산을 두고 세무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이 선대 회장이 태광그룹 계열사 명의로 보유하고 있던 주식이 상속세 신고에서 누락됐음이 드러났다. 이 일은 검찰의 태광그룹 비자금 수사로 이어졌고, 수사 과정에서 이호진 당시 회장이 단독으로 처분했거나 본인 명의로 전환한 차명 주식과 채권이 줄줄이 확인됐다.

생각지 못한 차명 재산이 등장한 가운데 태광그룹 자금 관리를 맡은 A씨가 2010년 10월~2011년 1월경 딸 재훈 씨에게 액면가 400억원어치 채권을 맡긴 사실이 드러났다. 이 일로 해당 채권을 누가 가져야 하는지를 두고 이 전 회장과 재훈씨간 다툼이 시작됐다. 이 전 회장은 2012년부터 계속 내용증명을 보내 채권 증서를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재훈 씨는 번번이 거절했다. 이에 이 전 회장은 수감 생활 중인 2020년 3월 누나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이 전 회장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단독으로 채권을 상속받았고, A씨를 통해 누나에게 잠시 채권을 맡긴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재훈 씨가 이 전 회장의 요청에도 채권을 돌려주지 않았으므로 채권 액면가만큼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재훈 씨는 "유언의 '나머지 재산' 부분은 무효이므로 동생이 단독으로 상속한 것이 아니다"라며 "동생으로부터 채권을 위탁받지도 않았다"고 맞섰다.

法 "유언장은 무효지만... 누나는 400억 돌려줘야"

법원은 재훈 씨 주장대로 유언장 내용 중 ‘나머지 재산’ 처분과 관련한 부분은 무효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유언장의) 앞뒤 문맥상 이기화 사장의 재량에 따라 처리하라는 취지"라며 "선대 회장의 유지를 고려하거나 태광그룹의 경영권 승계에 부합해야 한다는 제한이 없으므로 일신 전속성에 반한다"고 했다. 일신 전속성이란 유언이나 결혼처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속성을 말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 전 회장은 이를 두고 "상속인들 사이의 경영권 분란을 예방하고자 외삼촌을 통해 '나머지 재산'이란 형태로 내게 집중시킨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유언에 표시되어 있지 않고 추론할 수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이 재훈 씨로부터 차명 채권의 액면가만큼인 400억원을 받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 전 회장이 아버지의 사망 이후 채권을 적법하게 관리해왔고 재훈 씨가 이의 제기를 통해 재산을 요구할 수 있는 기한도 끝났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은 상속 개시 때부터 자금 관리인을 통해 채권증서를 실질적으로 점유·관리해 채권을 적법하게 취득했다"며 "재훈 씨가 상속권 침해를 다투려면 정해진 기간(침해를 안 날로부터 3년, 침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10년) 안에 소를 제기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한 재훈 씨가 가지고 있는 채권은 이 전 회장으로부터 보관을 위탁받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이 재훈 씨에게 잠시 보관 맡긴 것이 아니라면 이 채권을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겨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재훈 씨가 1심 판결 이후 곧바로 항소했음을 고려하면 태광그룹 남매의 상속 분쟁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항소심 첫 공판은 다음 달 8일 열린다.

박시온 기자 ushire90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