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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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을 핵심 국정과제로 추진해온 윤석열 정부가 보험료율 인상 등 구체적 ‘숫자’가 없는 연금개혁안을 내놨다.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해 수급 개시 연령을 65세에서 늦추는 안은 사실상 접었다. 보험료율 인상 속도를 연령대별로 차등화하고, 인구구조 변화와 경제적 여건 변화에 맞춰 수급자들의 연금액 증가 속도를 늦추는 등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반영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지만 모든 결정 책임을 국회로 넘겼다. 연금개혁을 방치했다고 비판해온 문재인 정부가 제시했던 소위 ‘사지선다안’보다도 후퇴한 ‘맹탕 개혁안’이란 지적이 나온다.

○1년 넘게 논의한 끝에 결론은 '맹탕'


앞서 지난 3월 연금개혁 정부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가 발표한 5차 재정계산 결과 현행 제도(보험료율 9%, 소득대체율 40%, 지급개시연령 65세)가 유지될 경우 국민연금은 2040년 1755조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55년 완전 고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제도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는 지난 9월 보험료율 12%·15%·18%, 수급개시연령 66세·67세·68세, 국민연금 기금 수익률 0.5%포인트(p), 1%포인트 상향 등 변수를 조합한 18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했고, 최종적으론 소득대체율을 45% 또는 50%로 올리는 선택지를 포함한 24개 시나리오를 정부에 제출했다.

24개 시나리로로 ‘맹탕’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재정계산위는 추계 기간인 2093년에도 기금 고갈을 막을 수 있는 선택지로 보험료율을 15%로 높이고 수급개시연령을 68세로, 기금운용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는 안을 부각시켰다. 김용하 재정계산위원장(순천향대 교수)은 “우리의 시나리오는 2093년까지 적립 기금을 유지하는 것 하나다”며 “행간을 보면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위 ‘더 내고 늦게 받는’안을 강조한 셈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 가운데 기금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겠다는 것 외엔 어떤 숫자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보험료율에 대해선 국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 보험료율이 18.2%로 한국(9%)보다 2배 높은 점을 거론하며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해 점진적인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고만 언급하는데 그쳤다. 소득대체율 인상에 대해선 “공론화를 통해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며 논의를 미뤘고, 수급개시연령 상향은 “고령자 계속고용 여건이 성숙된 이후 논의를 시작한다”며 이번 정부 임기 중 추진을 사실상 접었다.

향후 연금개혁 논의도 정부가 아닌 국회로 책임을 넘기기로 했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주도로 공론화 등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고 정부는 공론화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 지원단을 운영하는 등 국회 논의를 뒷받침한다는 방침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은 의견이 다양한 만큼 특정안을 제시하기보다 공론화 과정을 통해 폭넓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했다”며 “국회에서 사회적 논의가 충실하게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총선 말고 이유 없어...연금개혁 폭탄돌리기 됐다"


정부가 결국 맹탕 개혁안을 내놓으면서 연금개혁의 공은 또 다시 국회로 넘어갔다. 지난 2월 국회 연금특위는 소득대체율 인상 등을 두고 여야 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자 “모수개혁은 정부의 몫이 더 강하다”라면서 “(국회는)구조개혁을 먼저 논의하고 정부안이 오면 그걸 갖고 해도 늦지 않다”며 정부로 책임을 떠넘겼다. 이후 8개월이 흘렀지만 연금특위는 구조개혁 관련해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또 다시 책임을 국회로 미룬 것이다.

‘맹탕’ 개혁안의 조짐은 이미 지난 5월부터 노출됐다. 작년 12월까지도 “개혁은 인기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반드시 우리가 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국무회의에선 “3대 개혁을 미룰수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연금개혁에 대해선 “하루, 이틀 안에 성급하게 다루기보다 우리 정부에서 반드시 그 골격과 합의를 도출해낼 것”이라 말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 역시 단일한 도출 여부에 대해 지난 6월 본지 포럼에선 “국민이 혼란을 느끼지 않고 선택할 수 있도록 (연금개혁) 정부안의 수를 최대한 적게 내겠다”고 공언했지만 최근 열린 복지부 국정감사에선 “이때까지 한 4번의 계획안이 나왔는데 그중 한두 번은 (숫자 없이)방향을 제시한 것도 있고 다양했다”며 확답을 피했다.

조 장관이 정부가 방향만 제시한 적이 있다고 언급한 것은 각각 2008년과 2013년 발표한 2,3차 국민연금종합운영계획이다. 이명박 정부 초기 발표된 2차 종합계획은 노무현 정부가 2007년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깎는 2차 연금개혁을 단행한 직후 이뤄져 구체적인 숫자를 도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은 건드리지 못했지만 대신 공무원연금 개혁을 단행했다.

이번 개혁안은 윤석열 정부가 그간 날을 세워 비판해온 전 정부의 개혁안보다도 후퇴한 수준이란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2월 '보험료율 12%, 소득대체율 45%',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등 '더 내고 더 받는' 두 가지 모수개혁안을 포함한 총 네 가지안을 국회에 제시해 '사지선다안'이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국회 연금특위에 참여 중인 한 연금 전문가는 "윤석열 정부에서 숫자 없는 개혁안을 내놓은 유일한 이유는 내년 총선"이라며 "연금 고갈에 대비해 대수술을 해야하는데 연금개혁이 폭탄돌리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부보다 총선에 더 민감한 것이 국회인데 무엇을 기대하겠나"며 "연금개혁은 정부가 명확히 아젠다를 설정하고 개혁안을 제출하는 것부터 시작돼야 하는데 앞뒤가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황정환/허세민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