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도 '류' 따라 자결?···공감 안되는 '투란도트'의 새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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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오페라단의 푸치니 '투란도트' 첫 공연
연극계 거장 손진책의 새로운 연출과 해석 눈길
세계적 테너 이용훈, 칼라프 역으로 국내 데뷔
연극계 거장 손진책의 새로운 연출과 해석 눈길
세계적 테너 이용훈, 칼라프 역으로 국내 데뷔
현대 오페라 공연의 트렌드 중 하나는 대본(리브레토)과 음악은 그대로 두면서 시·공간적 배경을 연출가의 해석과 의도에 따라 원작과 아예 달리하는 것이다. 서울시오페라단만 해도 지난해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연출 이혜영)을 공연할 때 극의 배경을 1940년대 뉴욕으로 바꿨고,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연출 장서문)는 지금의 서울을 연상시키는 현대적인 무대와 의상 연출로 공연했다.
독일어로 ’연출가 중심의 극‘을 뜻하는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오페라로 불리는 이런 공연은 관객에게 작품에 대해 새롭게 통찰할 기회를 주고 신선한 감흥을 불러올 수 있지만, 원작의 리브레토·음악과 새 배경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면 반감만 일으킬 수도 있다. 서울시오페라단이 지난 2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 푸치니의 미완성 유작 '투란도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이번 오페라 연출은 연극계 거장인 손진책(76)이 맡았다. 손 연출가는 마당놀이 등 연희극과 창극을 비롯한 음악극을 연출한 경험은 풍부하지만, 투란도트 같은 클래식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적은 없었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과 함께 푸치니의 4대 오페라 중 하나인 ’투란도트‘는 국내외 무대에 자주 오르는 인기 오페라 중 한 편이다. 푸치니는 이 작품의 3막 1장인 ’류의 죽음‘까지 작곡하고,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이중창과 왕궁의 피날레 송이 이어지는 마지막 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투란도트'는 10분이 채 안 되는 마지막 장을 푸치니의 후배 프랑코 알피노가 완성해 1926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이 마지막 장에는 주로 쓰이는 알피노 버전 이외에 여러 공연 버전이 존재한다. 반면 ’고대 중국 베이징’인 이 작품의 극 배경을 바꿔 공연하는 경우는 드물다.
손 연출가는 이 작품의 리브레토와 음악은 그대로 두고, 배경은 시대가 불분명한 디스토피아적 지하 세계로 바꿨다. 막이 열리면 베이징 왕궁 부근이 아니라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과 구조물, 계단으로 이뤄진 무대세트가 보인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칙칙하다. 건물과 등장인물의 현대적 의상은 흑색이나 회색빛이다. 지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군중(합창단)이 달빛을 노래할 때는 세트 사이 배경막에 커다란 보름달이 뜬다. 공교롭게도 푸치니가 완성한 3막 1장까진 원작의 내용이 그대로 진행된다. 캐릭터의 특성도 비슷하다. 망국(亡國)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가 얼음같이 차가운 공주 투란도트의 모습에 첫눈에 반하고, 목숨을 건 퀴즈 대결을 벌여 승리한다. 하지만 3막에서 칼라프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고 자결한 시종 류의 시체를 장정들이 메고 나갈 때 군중들이 그 뒤를 따르는 듯이 퇴장하는 장면부터 원작과는 다른 결말을 암시한다.
손 연출가는 마지막 장에서도 원작의 리브레토와 알피노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무대연출만으로 새로운 결말을 이끌어낸다. 칼라프와 밀고 당기는 이중창을 부른 투란도트는 원작과 같이 아버지인 황제가 있는 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류처럼 권총으로 자살한다. 직접적으로 무대에서 자살하는 모습이 보이진 않는다. 총소리와 핏빛 어린 조명만으로 추측하게 한다. 이어 투란도트는 원작처럼 황제 앞에서가 아니라, 먼저 세상을 떠난 류와 다정하게 손잡고 칼라프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밝힌다. 피날레에서는 압제에서 벗어난 듯 검은 옷을 벗고 흰옷을 입은 군중들이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결합과 앞날을 축하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는 듯한 노래를 부른다. 류의 희생과 죽음이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결합으로 이어지는 원작과는 달리 공주의 자살과 민중의 해방을 불러온 셈인데 공감하기 힘들다. 원작의 결말이 이해가 안 돼 다른 결말을 상상해 봤다는 연출가의 사전 설명을 들었어도 마찬가지다. 동시대적 감성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결말이다.
이날 공연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런던 로열오페라단 등에서 칼라프 역을 100회 이상 맡은 세계적인 테너 이용훈(50)의 국내 데뷔 무대였다. 그는 1막 아리아 ‘울지마라 류’나 2막에서 투란도트와 숨 가쁘게 퀴즈 대결을 펼치는 이중창 등에서는 특유의 서정적인 음색에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힘을 더한 리리코 스핀토 테너로서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다만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3막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 dorma)’에선 강약 조절이 원활치 않았고, 정인혁이 지휘하는 군포 프라임 필하모닉과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아 다소 아쉬웠다.
그는 공연 직후 “해외 일정으로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 부족한 점도 많고 힘이 들었던 데다 그 어떤 외국 무대보다 긴장되고 떨렸다“며 ”하지만 사랑하는 한국 팬들을 직접 만나 가슴 설레고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날 타이틀 롤을 맡은 소프라노 이윤정과 류 역의 서선영, 칼라프의 아버지인 티무르 역의 바리톤 양희준 등도 배역에 몰입해 좋은 가창과 연기를 보여줬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독일어로 ’연출가 중심의 극‘을 뜻하는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오페라로 불리는 이런 공연은 관객에게 작품에 대해 새롭게 통찰할 기회를 주고 신선한 감흥을 불러올 수 있지만, 원작의 리브레토·음악과 새 배경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면 반감만 일으킬 수도 있다. 서울시오페라단이 지난 2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 푸치니의 미완성 유작 '투란도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이번 오페라 연출은 연극계 거장인 손진책(76)이 맡았다. 손 연출가는 마당놀이 등 연희극과 창극을 비롯한 음악극을 연출한 경험은 풍부하지만, 투란도트 같은 클래식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적은 없었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과 함께 푸치니의 4대 오페라 중 하나인 ’투란도트‘는 국내외 무대에 자주 오르는 인기 오페라 중 한 편이다. 푸치니는 이 작품의 3막 1장인 ’류의 죽음‘까지 작곡하고,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이중창과 왕궁의 피날레 송이 이어지는 마지막 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투란도트'는 10분이 채 안 되는 마지막 장을 푸치니의 후배 프랑코 알피노가 완성해 1926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이 마지막 장에는 주로 쓰이는 알피노 버전 이외에 여러 공연 버전이 존재한다. 반면 ’고대 중국 베이징’인 이 작품의 극 배경을 바꿔 공연하는 경우는 드물다.
손 연출가는 이 작품의 리브레토와 음악은 그대로 두고, 배경은 시대가 불분명한 디스토피아적 지하 세계로 바꿨다. 막이 열리면 베이징 왕궁 부근이 아니라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과 구조물, 계단으로 이뤄진 무대세트가 보인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칙칙하다. 건물과 등장인물의 현대적 의상은 흑색이나 회색빛이다. 지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군중(합창단)이 달빛을 노래할 때는 세트 사이 배경막에 커다란 보름달이 뜬다. 공교롭게도 푸치니가 완성한 3막 1장까진 원작의 내용이 그대로 진행된다. 캐릭터의 특성도 비슷하다. 망국(亡國)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가 얼음같이 차가운 공주 투란도트의 모습에 첫눈에 반하고, 목숨을 건 퀴즈 대결을 벌여 승리한다. 하지만 3막에서 칼라프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고 자결한 시종 류의 시체를 장정들이 메고 나갈 때 군중들이 그 뒤를 따르는 듯이 퇴장하는 장면부터 원작과는 다른 결말을 암시한다.
손 연출가는 마지막 장에서도 원작의 리브레토와 알피노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무대연출만으로 새로운 결말을 이끌어낸다. 칼라프와 밀고 당기는 이중창을 부른 투란도트는 원작과 같이 아버지인 황제가 있는 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류처럼 권총으로 자살한다. 직접적으로 무대에서 자살하는 모습이 보이진 않는다. 총소리와 핏빛 어린 조명만으로 추측하게 한다. 이어 투란도트는 원작처럼 황제 앞에서가 아니라, 먼저 세상을 떠난 류와 다정하게 손잡고 칼라프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밝힌다. 피날레에서는 압제에서 벗어난 듯 검은 옷을 벗고 흰옷을 입은 군중들이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결합과 앞날을 축하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는 듯한 노래를 부른다. 류의 희생과 죽음이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결합으로 이어지는 원작과는 달리 공주의 자살과 민중의 해방을 불러온 셈인데 공감하기 힘들다. 원작의 결말이 이해가 안 돼 다른 결말을 상상해 봤다는 연출가의 사전 설명을 들었어도 마찬가지다. 동시대적 감성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결말이다.
이날 공연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런던 로열오페라단 등에서 칼라프 역을 100회 이상 맡은 세계적인 테너 이용훈(50)의 국내 데뷔 무대였다. 그는 1막 아리아 ‘울지마라 류’나 2막에서 투란도트와 숨 가쁘게 퀴즈 대결을 펼치는 이중창 등에서는 특유의 서정적인 음색에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힘을 더한 리리코 스핀토 테너로서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다만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3막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 dorma)’에선 강약 조절이 원활치 않았고, 정인혁이 지휘하는 군포 프라임 필하모닉과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아 다소 아쉬웠다.
그는 공연 직후 “해외 일정으로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 부족한 점도 많고 힘이 들었던 데다 그 어떤 외국 무대보다 긴장되고 떨렸다“며 ”하지만 사랑하는 한국 팬들을 직접 만나 가슴 설레고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날 타이틀 롤을 맡은 소프라노 이윤정과 류 역의 서선영, 칼라프의 아버지인 티무르 역의 바리톤 양희준 등도 배역에 몰입해 좋은 가창과 연기를 보여줬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