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솔직히 연금개혁을 공약으로 들고나오면 무조건 선거에서 지게 돼 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문제”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도 “인기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가 어제 내놓은 국민연금 개혁안은 실망스럽다. 국민이 매달 내는 보험료율을 얼마나 올릴지, 노후에 받을 연금은 어느 수준일지 핵심적인 수치는 쏙 뺀 채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그쳐서다. 이런 안을 내려고 지난해 8월부터 민간 전문위원회를 가동해 1년2개월간 밑작업을 했나 싶다. 그나마 세대별 형평성을 고려해 보험료율 인상 속도를 연령에 따라 차등화하는 안을 제시한 점이 눈에 띈다.

개혁 방안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 보건복지부 자문기구인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가 보험료, 수급 시기 등을 조합해 24개에 이르는 시나리오를 늘어놨지만 보험료율을 15%까지 올리고 지급개시 연령을 68세로 늦춰야만 현재 20세인 신규 가입자의 기대여명인 2093년까지 기금 고갈을 막을 수 있다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민감한 내용을 피한 것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인 결정을 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살 만하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국회와 공론화 과정을 통해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의 구체적인 수준을 결정해 나갈 계획”이라며 사실상 공을 국회로 넘겼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지난 2월 “보험료 말고 구조개혁부터 하자”며 보험료율 인상 등 모수 개혁을 정부 몫으로 돌렸는데, 이번엔 정부가 다시 국회로 책임을 넘기면서 ‘핑퐁 게임’을 이어가는 모습이다. ‘폭탄 돌리기’가 따로 없다. 공론화를 통한 국민적 공감대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의 발언은 ‘인기 없는’ 개혁을 여론으로 결정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려 불길하다. 무엇보다 총선을 반년도 안 남긴 상황에서 선거에 민감한 정치권이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전 정부의 연금개혁 실패를 답습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사이 연금 재정은 악화일로다. 최근 재정추계 결과를 보면 기금 소진 시점은 2055년으로 5년 전 문재인 정부 계산 때보다 2년 앞당겨졌다. 1990년생이 65세가 돼서 노령연금을 받을 때면 기금이 한 푼도 남지 않는다는 의미다.

윤 대통령이 강조한 대로 연금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것도 한시라도 빨리해야 미래 세대와 국가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절박한 과제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저출산·고령화 추세를 감안할 때 지금이야말로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연금재정 안정에 필요한 보험료 인상 폭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주호영 국회 연금특위 위원장은 “21대 국회 임기 안에 국민연금 개혁을 마치겠다”고 했는데 빈말이 되지 않길 바란다. 연금개혁을 또 뭉갠다면 직무유기로 미래 세대에 죄를 짓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