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 여배우와 결혼한 46세 男…1년 만에 이혼한 이유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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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미켈란젤로'
조지 프레드릭 와츠(1817~1904)
연애는 젬병이었던 성실한 화가
희망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다
조지 프레드릭 와츠(1817~1904)
연애는 젬병이었던 성실한 화가
희망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다
![앨런 테리(선택, 1864).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는 동백꽃은 세속적인 허영심을, 소박해 보이지만 향기로운 제비꽃은 고귀한 가치를 상징한다.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테리의 모습을 그렸다.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16.1.jpg)
두 남녀는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천재 화가의 아내가 될 생각에 행복했습니다. 당시 배우는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이 아니었고 근로 조건도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으로 그녀는 ‘천재 화가의 뮤즈’가 돼 명예롭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을 터였습니다. 화가도 행복했습니다. 그림 실력도 인품도 훌륭했던 그였지만, 사랑에는 영 젬병이라 이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살짝 늦긴 했어도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게 되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겠지요.
하지만 이들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남자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이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오늘은 ‘영국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며 19세기부터 20세기 초입까지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던 거장, 조지 프레드릭 와츠(1817~1904)의 예술과 사랑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자수성가한 흙수저
와츠는 조금 내성적이고 서툰 면이 있지만 속이 깊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성실했습니다. 쉽게 말해 ‘진국’이었습니다. 이런 성격은 그의 어린 시절 만들어졌습니다.와츠의 아버지는 악기를 만드는 장인이었습니다. 예술에 대한 소양이 깊고 세련된 사람이었지요. 아들이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과 똑같은 날(2월 23일) 태어나자 아들에게 조지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장사 수완이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집은 가난했습니다. 게다가 와츠가 여섯살 때 세 명의 형제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엔 어머니마저 같은 병으로 잃는 비극이 덮쳤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와츠는 내향적이고 진지한 성격이 됐습니다.
돈은 잘 벌지 못했어도 예술적 감각이 있었던 아버지는 어린 와츠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열 살이 된 와츠를 자신이 아는 조각가의 스튜디오에 보내 공부시켰지요. 와츠는 그곳에서 일을 도우며 미술 공부를 했고,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가져온 대리석 부조 조각들을 보며 감각을 키웠습니다.
![17세의 자화상(1834). /와츠갤러리](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3.1.jpg)
하지만 와츠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밤마다 다음날 입고 나갈 옷을 갖춰 입고 바닥에서 잔 것도 아침에 그림 그리러 나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때로 젊은 사람들은 좀 미련한 짓을 하면서 각오를 다지곤 하지요. 이런 마음가짐 덕분이었는지 실력은 일취월장했습니다. 이듬해 와츠는 18세의 나이로 왕립예술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합니다.
![상처입은 왜가리 (1837). 왓츠는 어린 시절 참새를 기르다가 실수로 새장 문을 잘못 닫아 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있었다. 섬세한 성격의 그는 이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이후 새와 깃털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자주 그렸다. /와츠갤러리](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8.1.jpg)
예술은 알아도 사랑은 몰라
![헨리 토비 프린셉(1871). 홀랜드하우스를 빌려 쓰고 있었던 프린셉 부부는 왓츠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와츠갤러리](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9.1.jpg)
리틀 홀랜드 하우스는 당시 런던 예술계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떠들썩하지만 집에 갈 때는 허무한 일반적인 사교 모임과 달리, 일요일 오후마다 열리는 리틀 홀랜드 하우스의 살롱에서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이 진지한 토론과 인간적인 교류를 나눴습니다. “3일만 머물다 가려고 와서 30년을 머물러 버렸다.” 훗날 와츠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와츠는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그렸고,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하지만 연애만큼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로 ‘썸’은 몇 번 탔지만,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습니다. 여주인의 친척이자 살롱의 단골 손님이었던 버지니아 패틀과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버지니아는 당시 살롱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미모도 미모였지만 교양과 매력이 아주 뛰어났지요. 한 화가는 그에 대해 “손끝까지 예술적이었고, 예술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와츠의 인품과 실력을 알아본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와츠를 격려했고, 인간적인 호감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와츠도 버지니아를 연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것뿐이야. 그녀는 귀족이고, 나는 서민 출신인걸. 내 사랑을 얘기해봤자 비웃음만 당할 게 뻔해.’ 대신 와츠는 버지니아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버지니아 패틀(1849~1850). 운명의 장난으로 그는 이 작품 때문에 버지니아를 다른 남성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스트노르성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31.1.jpg)
버지니아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를 반하게 했던 붓은 와츠의 붓뿐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모든 붓은 신발 닦는 솔처럼 느껴졌다.” 한편 1910년 버지니아의 부고 기사에도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와츠의 그림은 그녀의 매력을 더했다. 그런 위대한 아름다움은 세상에 주는 선물이다.”
30세 연하와 결혼한 아저씨
와츠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돈도 많이 벌어서 꽤 부자가 됐습니다. 인품도 훌륭해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를 좋아한다는 여성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연애는 여전히 잘되지 않았습니다. 운이 따르지 않았고, 자신의 매력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서툰 성격 탓도 있었습니다. 39세 때인 1856년 와츠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결혼할 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중국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겠어.” 그렇게 세월이 흘러 1863년이 됐고, 와츠도 46세가 되었습니다. 결혼은 거의 포기 상태였습니다.![앨런 테리(1864). /영국 국립 초상화 갤러리](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4.1.jpg)
엘런도 와츠가 자신을 그리는 게 좋았습니다. 멋지고 고상한 리틀 홀랜드 하우스의 분위기, 아름다운 정원과 스튜디오, 조용한 목소리와 우아한 예절을 갖춘 온화하고 예술적인 사람들…. 다소 거칠고 열악한 극장의 분위기에 익숙하던 그녀에게, 살롱에서 와츠의 그림 모델이 되는 건 꿈만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사랑과 삶(1884~1885). 작가가 자신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은 그림이다. 그는 이 그림에 긴 설명을 붙였다. 그 중 일부를 옮긴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1.1.jpg)
처음에는 그저 ‘아껴주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와츠는 자신이 엘런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됐습니다. 엘런이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도 와츠에게는 매력으로 느껴졌습니다. 와츠가 이때까지 연애 감정을 나눴던 사람들을 비롯해 그가 아는 대부분의 여성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가 찾아온 것입니다. 엘런도 와츠에게 사랑을 느꼈습니다.
![자화상(1864). /테이트](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2.1.jpg)
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나이 차이와 성격 차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집주인의 아내 사라였습니다. 잠깐 머무는 손님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평민 출신의 못 배운 어린 여자애’가 같은 집에 사는 게 갈수록 사라의 마음에 거슬렸던 겁니다. “머리가 그게 뭐니?” “너는 아는 게 없으니 손님들이 오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커리어를 모두 포기하고 결혼했는데, 졸지에 지독한 시집살이가 시작된 겁니다.
와츠가 화끈하게 엘런의 편을 들어 주고 나가서 따로 집을 구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러질 못했습니다. 사정은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집주인 부부에게 입은 은혜가 있을뿐더러, 집주인에게 밉보이면 자신의 사회적·예술적 기반인 살롱 사람들에게 완전히 소외될 게 뻔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둘은 일 년도 채 안 돼 이혼하게 됐습니다.
![익사자 발견(1850년경). 당시 빈곤층의 삶은 비참했고, 여성의 삶은 더욱 힘들었다. 와츠는 이를 주목한 몇 안되는 화가 중 하나였다. 여성의 시신, 그리고 차가운 도시의 밤 풍경이 대비를 이룬다. /와츠 갤러리](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7.1.jpg)
와츠도 23년 뒤인 1886년 예순아홉 살의 나이로 재혼했습니다. 이번엔 나이 차이가 더 컸습니다. 아내인 메리가 와츠보다 서른두 살 어렸거든요. 이번에는 둘의 뜻이 잘 맞았고 결혼을 방해할 사람도 없어서 와츠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메리(1887). /와츠 갤러리](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5.1.jpg)
서툴지만 좋은 사람, 익숙한 감동을 전하다
![루이스 리드 듀카스의 초상(1897).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32.1.jpg)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스타일은 유행과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성경이나 신화를 통해 인생의 교훈이나 신의 말씀을 전하던 과거 명화들과 달리, 당대의 유럽 화가들은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와츠는 여전히 그림을 통해 사랑이나 검약, 약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요. 본인부터가 “눈을 즐겁게 하는 작품보다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생각을 전하는 게 내 작품의 의도”라고 대놓고 설명했을 정도입니다. 이는 확실히 좀 뻔한, ‘한물간 생각’이긴 했습니다. 당시 전통적인 스타일의 그림들 대부분이 냉혹한 비평을 받고 세상에서 잊힌 것도 이 때문입니다.
![미노타우르스(1885).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르스가 배를 타고 오는 희생자를 기다리는 모습인데, 당시 소아성애자들을 비판한 그림이다. /테이트](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17.1.jpg)
![시스템의 씨 뿌리는 사람(1902). 추상회화의 시작과도 같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왓츠는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기도 했는데, 우주를 만들고 있는 창조주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테이트](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6.1.jpg)
![맘몬(1885). 신약성서에 나오는 악마로 7대 죄악 중 인색을 상징한다. 황금만능주의와 탐욕을 비판한 그림이다. /테이트](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20.1.jpg)
더 중요한 건 왓츠의 인품이 너무나도 훌륭했다는 점입니다. 화가는 작품은 물론이고 자기 삶으로도 그 작품에 담은 뜻을 증명해야 합니다. 예컨대 작품을 통해 줄기차게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던 작가가 사실은 갑질을 하거나 성추행을 저질렀다면, 그가 이때까지 만들었던 작품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와츠는 자신의 성실함과 삶으로 작품 속에 담긴 메시지를 증명했습니다. 그는 항상 예술에 헌신하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고,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왔으며, 자기 작품 대부분을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1904년 세상을 떠날 때 와츠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화가 중 하나였습니다. 한 귀족은 그에게 헌정하는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불멸의 스승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친절한 최고의 남자.” 전 세계 언론들이 수백 개에 달하는 부고 기사를 썼고, 그 내용 대부분은 위인전에 가까운 칭찬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들을 읽다 보면 “이렇게 착하고 친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어딨어? 세상을 떠났다고 너무 칭찬만 한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잠깐 들 정도지만, 어떤 편지나 기록에서도 그의 인품에 대한 기록은 오직 칭찬뿐입니다.
![희망(1886). 손녀를 잃은 슬픔을 담은 그림이다. 와츠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01.34914318.1.jpg)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G. F. Watts: The Last Great Victorian (Vernoica Franklin Gould 지음), G. F. Watts : Victorian Visionary (Mark Bills, Barbara Bryant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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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4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