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탁(書卓) 이라는 고가구가 있다. 풀어쓰면 ‘책 탁자’인데, 말 그대로 책을 올려두기 위한 쓰임새로 만들어졌던 것이고, 주로 선비들이 사용했던 사랑방 가구이다. 선비라면 책을 항시 가까이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사랑방에는 책장, 탁자, 서탁과 서안, 경상 같은 책과 관련된 가구를 많이 놓았다.

조금 더 나눠보자면, 책장과 탁자는 보통 아래 위로 세 칸 이상 층이 분할되어있는 키가 큰 입식 가구고, 서탁과 서안(書案), 경상(經床) 같은 것은 좌식 가구다. 아마 요즘엔 거의 안 쓰는 말일 텐데, ‘앉은뱅이 책상’을 생각하면 딱 맞다.

그렇다면, 이번 칼럼의 주제 “서탁”과 서안, 경상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서안과 경상은 용도가 같다. 그냥 좌식 책상이다. 대신 천판(天板), 다시 말해 맨 윗면, 책을 펼쳐서 보고, 글도 쓰고 하는 면의 양쪽 귀가 위로 말려 올라가있으면 경상, 일직선으로 평평하면 서안이다. 이 둘은 혼용되어 쓰이진 않는다.
서안(왼쪽)과 경상(오른쪽),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서안(왼쪽)과 경상(오른쪽),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서안과 서탁은 명칭이 이래저래 혼용된다. 그래도 통상, 공식적으로 약속한 적은 없겠지만, 평평한 천판에 간결한 다리가 달려있고, 아래에 여닫이 서랍이나, 선반을 달아 책을 내려놓는 공간을 두었으면 서안, 없으면 서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섞어서 불러도, 별 상관은 없다.

대신 반대로 불렀을 때 소통이 좀 애매해지는 경우도 있다. 좌우 길이가 1m를 훌쩍 넘는 기다란 널판 양 끝에 다리를 달아 놓은 형태의 가구를 부를 때다. 적어도 업계에서는, 이런걸 “서탁”이라고 해야 ‘뭘 좀 아는 사람’이 된다. 서안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답인 것도 아니다. 어쩌면 서안보다는 그냥 탁자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옛 물건들은 이런 명칭이 참 어렵다.
서탁,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서탁,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벤치인가?’ 싶을 수 있는데, 절대 앉을 수는 없다. 이것은 진득한 묵향이 서린, 읽은 책이든, 읽을 책이든, 서책을 옆으로 쭉 늘어놓을 요량으로 만들어진, 책과 글을 위한 가구다. 이런 서탁은 좌우 너비가 보통 50~70cm 정도 되는 서안이나 경상보다 훨씬 귀하다.

모양새를 보라, 이건 세월을 오래 버틸 수가 없다. 긴 것은 좌우 너비가 160cm, 아니 180cm가 넘는 경우도 있는데, 다리는 양 끝에 하나씩만 달아야 하니 두꺼운 나무를 쓸 수도 없다. 모양새도 어찌 그리 담백 간결한지, 흔한 금속 장석(裝錫) 하나도 쓰지 않았다. 서울옥션 메이저경매 출품 수량으로만 보아도, 서안과 경상이 각각 약 마흔 번, 쉰 번 출품될 동안, 이런 서탁은 대여섯 번 정도 출품되었으니, 귀하디 귀하다.

서탁은 ‘멋쟁이 가구’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는데, 장식 하나 없이 단순한 조형미로만 승부 보는 이 고가구들을, 구력 있는 어른들이 ‘멋쟁이’라고 불렀다. 원래 진짜 옷 잘입는 패피들도, 장식을 더하고 더하는 ‘투머치’형 보단 무언가 한 끗의 변화만으로 멋을 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특히 이런 서안, 서탁 같은 종류에서, 장식이 최소화 되어있으면서, 천판이 좌우로 넓게 쭉 뻗어 비례에만 살짝 변화를 준 가구들을 가리켜 ‘멋쟁이가 나왔다’라고 하면 찰떡같이 소통이 되었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편입된 이건희 컬렉션에도 단연, 멋쟁이 서안 하나가 있다.
서안,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컬렉션
서안,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컬렉션
멋쟁이는 멋쟁이를 알아보는 법, “서탁”에 대한 이번 칼럼은 필자가 만난 최고의 멋쟁이 어르신, 박서보 선생님에 대한 나름의, 조금 늦은 추모사다.
지난 2월, 서울옥션 경매에 서탁 하나가 오랜만에 나왔다. 좌우 폭이 165cm쯤 되는, 단정한 맛이 있는 서탁이었다.
서탁, 조선시대, 개인소장
서탁, 조선시대, 개인소장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았더니 “박서보예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직통번호(?)로 통화하기는 처음이라 좀 긴장했는데, 용건은 그 서탁에 대한 것이었다. 선생께선 이미 연희동 기지(GIZI), 햇살이 잘 드는 2층 창가에 시원한 비례의 널찍한 멋쟁이 서탁을 가지고 계셨다. 떨렸지만 실리 따지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필자의 성격을 알고서 물어오신 것일 테니,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

“잘 나오지 않는 것이고, 선생님께서 워낙 이런걸 좋아하시니 사셔도 좋겠습니다. 다만 이미 연희동에 가지고 계신게 훨씬 좋으니 시작가 정도에서 해보시면 어떨까요?” 연희동에 있는 것이 더 좋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당신께서 이미 가지고 계신 서탁의 비례와 멋에 대해 자랑을 하시더니,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권대섭 선생이 완성해 온 백자가 왔는데 아주 그럴듯하니 구경하러 와요.”라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경매 결과를 보니, 그 서탁은 시작가에 낙찰되어 있었다. 전화도 한번 더 왔다. 손맛이 살아있는 귀얄무늬 분청사기를 구하고 싶다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재차 놀러 오라고 하셨었는데,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즈음 암투병 사실을 밝히신데다가 신작 열정을 불태우시기에, 실례가 될까 싶어 작업실 방문을 몇 번 미루었더니, 바깥 행사에서 얼굴 도장만 찍은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장례식장을 다녀오며 알 수 없는 쓸쓸한 감정에 휩싸였다. 상가(喪家)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가, 못 지킨 약속 때문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한 벽을 가득 메운 이건희 컬렉션을 보면서 느낀 그 허한 감정이 떠올랐다. 또 한 명, 고미술 애호가의 상실이 주는 헛헛함과 두려움이었다.

SNS에 올린, 박서보 선생님 생전에 이뤄졌던 작업실 투어 후기 사진에서 수운 유덕장(岫雲 柳德章, 1675~1756)의 묵죽도(墨竹圖) 아래에 자리잡은 그 서탁을 보았다. 대나무 그림 아래, 그 자리에는 단정한 맛의 이 서탁이 딱 맞았다. 이게 고가구의 매력이다.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모두 제 자리가 있다. 대가의 묘법(描法, Ecriture)에도 저마다 딱 맞는 색이 있고, 연속되는 수직 패턴 속에 제 자리를 잡은 ‘창(窓)’이 있었듯이.

이제 역사가 되신 멋쟁이 어르신의 서탁을 보면서, 막연히 ‘다음 멋쟁이가 나타나겠지, 아니면 나라도 멋쟁이가 되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진짜 멋쟁이가 되기 위해선 돈도 있어야 하고, 지식은 필수고, 할 말은 하는 용기와 비판을 받아내는 배포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시대를 관통하는 멋을 알아보는 날 선 안목은 기본이겠다. 큰 어른의 영향력은 햇빛과도 같다. 필자의 머릿속에도 이렇게 한 줄기 따사로움이 지나간다.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주신 박서보 선생님께, 영원히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