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전범재판은 실패"...日은 무죄 주장한 인도 재판관 비석을 야스쿠니에 세웠다 [WSJ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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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의 판결(Judgement at Tokyo)
게리 J. 바스
크노프
912쪽│36달러
게리 J. 바스
크노프
912쪽│36달러
1946년 5월 3일. 일본 도쿄 중심부 육군사관학교 건물에 11명의 국제 판사가 모였다. 법정으로 개조된 강당에 일본의 전직 군인 및 민간인 지도자 26명이 들어섰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개회하며, 어떤 사안이든 심리할 준비가 됐다"는 재판장의 선언과 함께,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일본 전범 용의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도쿄에서의 판결>은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의 준비와 판단 과정, 그리고 재판 결과의 장기적 영향을 분석한 책이다. 책은 도쿄 재판을 "실패한 재판"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흐지부지 끝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제법의 허점과 국제사회의 무능함을 드러냈고, 이게 오늘날 전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게리 J. 바스 미국 프린스턴대 정치학 교수가 썼다. 그는 "나치 독일 지도자들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의 기록은 풍부하지만, 도쿄 재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며 집필 이유를 설명했다. 할복에 실패한 채 체포된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의 일화부터 11차례에 걸친 히로히토 일왕과 맥아더 장군의 비공개 회동, 일본군의 만행에 관한 각계의 증언 등을 엮었다.
재판은 2년 넘게 진행됐다. 지정학적 갈등의 골이 깊은 데다 도덕적·법적 쟁점이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 출신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일본 피고인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는지, 전쟁 행위 자체로 범죄가 성립하는지, 나치 독일의 사례처럼 조직적인 학살로 볼 수 있는지 등이 문제가 됐다.
검찰은 광범위한 증거를 제출했다. 100만명 이상의 필리핀 사상자,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 눈을 가린 채 참수당한 호주 포로 등 사례가 제시됐다. 수많은 증언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묘사했다. 결국 7명의 피고인이 사형을, 16명이 종신형을 받았다. 2명은 그보다 낮은 형을 선고받았다. 1명은 정신이상으로 면제됐다. 재판부의 내부 분열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일각에서는 일왕을 법정에 올리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죄가 없다고 판단했다. '극동군사재판소의 설립에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마저 나왔다. 포츠담 선언 당시 "모든 전범에 대한 엄정한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는 모호한 조건을 내걸었을 뿐, 구체적인 절차나 방법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중재하는 게 재판장의 역할일테지만, 윌리엄 웹 재판장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다. 네덜란드 판사는 그를 두고 "독재자"라고 한탄했고, 뉴질랜드 판사는 "언제 어디서나 분란을 조장한다"고 평했다.
재판소의 설립 근거에 대한 불신, 재판부 내부의 갈등과 리더십의 부재. 모든 문제가 결합한 결과 11명의 재판관 중 3명이 유죄판결에 대해 반대의견을 냈다. 인도 출신의 라다비노드 팔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의 행위는 정당방위고, 조직적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며, 원자폭탄 투하를 고려할 때 미국과 동맹국도 유죄라는 논리를 펼쳤다.
반대의견을 낸 이들의 주장은 이후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입맛대로 활용됐다. 자기들한테는 전쟁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근거 자료로 쓰였다.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는 팔 재판관의 기념비가 있다. 저자는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평화롭고 단결된 서유럽과 달리, 전후 아시아에는 불안정한 무질서가 감돈다"고 지적한다.
책은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 무력 분쟁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도쿄 재판은 미래 전쟁을 막기 위한 법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정리=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이 글은 WSJ에 실린 톰 나고르스키의 서평(2023년 10월 28일) ‘Judgement at Tokyo Review: Japanese War Crimes on Trial'을 번역·편집한 것입니다.
<도쿄에서의 판결>은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의 준비와 판단 과정, 그리고 재판 결과의 장기적 영향을 분석한 책이다. 책은 도쿄 재판을 "실패한 재판"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흐지부지 끝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제법의 허점과 국제사회의 무능함을 드러냈고, 이게 오늘날 전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게리 J. 바스 미국 프린스턴대 정치학 교수가 썼다. 그는 "나치 독일 지도자들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의 기록은 풍부하지만, 도쿄 재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며 집필 이유를 설명했다. 할복에 실패한 채 체포된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의 일화부터 11차례에 걸친 히로히토 일왕과 맥아더 장군의 비공개 회동, 일본군의 만행에 관한 각계의 증언 등을 엮었다.
재판은 2년 넘게 진행됐다. 지정학적 갈등의 골이 깊은 데다 도덕적·법적 쟁점이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 출신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일본 피고인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는지, 전쟁 행위 자체로 범죄가 성립하는지, 나치 독일의 사례처럼 조직적인 학살로 볼 수 있는지 등이 문제가 됐다.
검찰은 광범위한 증거를 제출했다. 100만명 이상의 필리핀 사상자,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 눈을 가린 채 참수당한 호주 포로 등 사례가 제시됐다. 수많은 증언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묘사했다. 결국 7명의 피고인이 사형을, 16명이 종신형을 받았다. 2명은 그보다 낮은 형을 선고받았다. 1명은 정신이상으로 면제됐다. 재판부의 내부 분열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일각에서는 일왕을 법정에 올리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죄가 없다고 판단했다. '극동군사재판소의 설립에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마저 나왔다. 포츠담 선언 당시 "모든 전범에 대한 엄정한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는 모호한 조건을 내걸었을 뿐, 구체적인 절차나 방법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중재하는 게 재판장의 역할일테지만, 윌리엄 웹 재판장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다. 네덜란드 판사는 그를 두고 "독재자"라고 한탄했고, 뉴질랜드 판사는 "언제 어디서나 분란을 조장한다"고 평했다.
재판소의 설립 근거에 대한 불신, 재판부 내부의 갈등과 리더십의 부재. 모든 문제가 결합한 결과 11명의 재판관 중 3명이 유죄판결에 대해 반대의견을 냈다. 인도 출신의 라다비노드 팔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의 행위는 정당방위고, 조직적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며, 원자폭탄 투하를 고려할 때 미국과 동맹국도 유죄라는 논리를 펼쳤다.
반대의견을 낸 이들의 주장은 이후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입맛대로 활용됐다. 자기들한테는 전쟁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근거 자료로 쓰였다.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는 팔 재판관의 기념비가 있다. 저자는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평화롭고 단결된 서유럽과 달리, 전후 아시아에는 불안정한 무질서가 감돈다"고 지적한다.
책은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 무력 분쟁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도쿄 재판은 미래 전쟁을 막기 위한 법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정리=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이 글은 WSJ에 실린 톰 나고르스키의 서평(2023년 10월 28일) ‘Judgement at Tokyo Review: Japanese War Crimes on Trial'을 번역·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