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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나라는 금융시스템을 개혁하고 공공재정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부실한 기업들의 구조를 조정하거나 시장에서 퇴출했다.
모 보험사 손해사정인으로 16년째 근무 중이던 장대국 씨(64·사진)도 IMF 사태 여파로 원치 않게 명예 퇴직했다. 회사가 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도산하면서다. 미국 쌍둥이 빌딩이 폭격을 당한 2001년 9월 무렵이었다. 당시 상관이 "개인 면담을 하자"며 장 씨를 불렀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사표를 냈다.
이직을 시도했지만 나빠진 경기 탓에 직원을 구하는 회사가 많지 않았다. 장 씨는 작은아버지가 하던 부동산에서 잠시 일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장 씨는 "사람 만나기 싫고, 전화 받기도 싫었다"며 "서너 달 지나서는 집 안에 처박혀 지냈다"고 회상했다. 극심한 우울증이 시작됐다.
장 씨는 자살 충동을 매일 같이 느꼈다고도 했다. 극단적 선택을 해보려 세 번가량 시도했던 그였다. 집 근처 고가차도의 육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어느 날이었다. 장 씨는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얼굴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그는 전문적인 정신과 치료를 꾸준히 받았다.
"가족의 격려와 신앙의 힘 덕분에 바닥을 딛고 재기할 수 있게 됐다"며 어두운 시절을 지나고 보니 인생은 그저 그런대로 살 만하다"고 장 씨는 말했다. 그는 현재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상담가 겸 목사로 활동 중이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강대국(64)이라고 합니다. 1986년부터 손해보험사 손해사정인으로 일하다가 IMF 때 실직했습니다.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고, 자살 시도를 세번가량 했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현재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목회 활동을 병행하면서 ‘월드 전인 치유 상담센터’를 운영 중입니다. 구청의 ‘자살 예방 생명지킴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만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자살 예방 생명지킴이’ 활동에 관해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생명지킴이 활동가는 보건소에서 매칭해준 자살 잠재 위험군 대상을 보살핍니다. 전화나 문자로 소통하고, 때로는 가정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명존중 문화조성 캠페인 활동을 진행하고, 번개탄으로 자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희망판매소(번개탄 판매업체)를 모니터링, 기타 자살 예방 홍보 활동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생명지킴이 활동을 시작하셨나요?
"저 자신도 극심한 우울증, 불면, 불안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활동하면 주로 어떤 분들을 만나게 되나요?
"고립된 1인 가구, 우울증 및 정신질환자, 부부 문제가 있는 사람, 이혼자, 알코올 및 각종 중독자를 만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혼 후 우울증, 공황장애, 간경화 등 육체의 질병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중년 남자분을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6개월간의 상담 끝에 그분이 어느 정도 치유된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최근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고 곧 결혼한다고 합니다. 집에서만 무기력하게 지내던 이웃이었는데 직장을 구해 출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활동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습니다." ▶한때 우울증을 직접 겪으셨었는데 어떤 요인 때문이었나요?
"이공계 대학을 나와 손해사정인으로 일했습니다. IMF 사태 때 회사가 도산했습니다. 16년 차 직원이었고 노동조합 활동을 잠깐 했었습니다. 원하지 않게 명예퇴직했습니다. 미국 쌍둥이 빌딩이 폭격을 당한 2001년 9월 무렵이었습니다.
이직을 시도했지만, 나라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서울 강남에서 친척이 하던 공인중개업소에서 몇 달간 일해보기도 했지만, 출근길이 늘 고역이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서너 달 출퇴근하다가 집에서만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극심한 우울증과 불면, 불안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어떤 증상이 나타났었나요?
"모든 욕구가 없었습니다. 식욕이 없어 밥도 먹고 싶지 않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도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 활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살 충동은 수시로 느꼈습니다. ‘모든 것은 내가 못나서 그렇지.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네 ’ 온통 부정적인 생각이 들고, 또다시 우울하게 되는 악순환이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 위험한 생각이 밀물처럼 마음에 밀려오곤 했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집 근처 고가도로 육교에서 차가 쌩하고 달리는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던 적도 세 번 있었습니다."
▶고난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나요?
"어머님의 격려와 가족들, 기독교 신앙의 힘 덕분에 마음속에서 어둠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몇 달간 방에 처박혀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워 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천릿길 고향에서 상경하셨다가도 ‘갇힌 새처럼 도시 생활이 갑갑해서 싫다’고 하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지내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올해도 농사는 잘 되었다. 쌀은 내가 보내 줄 테니, 다른 생각은 말고 어찌하든 마음 굳게 먹고…." 전화로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시고 울먹이시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울증을 심리적 나약함이나 굳세게 마음먹으면 사라지는 문제 정도로 치부하곤 했습니다. 다음날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우울증’이라며 왜 이제 왔느냐”고 했습니다. 신경정신과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습니다. 기도원을 찾아 통곡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마음을 채웠던 어두운 마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어떤 삶을 사셨나요?
"제가 치유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치유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연세대 대학원에 가서 신학과 일반 상담을 공부했고, 목사가 됐습니다.
▶많은 현대인이 가족, 관계, 직장 등의 문제로 시름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원인은 가족의 해체라고 생각합니다. 1인 가구 비중이 늘면서 고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문화가 바뀌고 있습니다.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지다 보니 개인주의가 만연해졌습니다. 젊은이들은 결혼을 ‘선택’의 영역으로 두고 있습니다. 힘든 순간은 누구에나 찾아옵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오는데, 그런 사회적 경계망이 허물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여건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정리해고 등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업 실패로 재기하지 못하고 시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고통과 아픔 속에 있는 이들이 다시 사회로 복귀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사회 차원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근본적으로는 경제적인 여건이 나아져야 합니다. 우울증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다뤄야 합니다. 영국에서는 2018년 ‘고독부’를 정부 부처로 신설하고 ‘외로움 장관’을 임명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처럼 ‘고독 문제’를 전담하는 정부 부처가 있어야 합니다.
지자체는 지역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생명지킴이 활동처럼 지역 이웃 간 관계망을 두텁게 조성할 수 있도록 지자체가 중간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꼭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면요?
"힘든 시간을 지나오고 보니 인생은 충분히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지만, 힘든 일은 반드시 끝난다는 믿음과 여유가 때로는 필요합니다.
인간은 바다를 항해하는 돛단배 같아요. 배는 때로는 폭풍을 만나기도 하고, 그랬을 때는 죽을 것 같잖아요. 하지만 바다도 잔잔해질 때가 있잖아요.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니 끝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모두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