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의 2·3세 경영진이 조중훈 창업주가 스위스 은행에 남긴 거액의 재산과 관련해 부과된 상속세를 내야 하는지를 두고 과세당국과 다툰 소송 2심에서 승소했다. 1심은 과세당국이 부과한 상속세 852억원을 모두 내야 한다고 봤지만, 항소심에선 이 중 약 400억원은 납부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이승한)는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등 조 선대회장의 자녀 및 손자녀 일곱 명이 “상속세 부과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최근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852억원의 상속세 부과 처분 중 440억원을 초과하는 부분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조 선대회장은 1999년 12월 스위스 모 은행에 무기명 계좌를 개설해 2900만달러와 5600만달러를 차례로 입금했다. 이 중 5000만달러(약 600억원)가 2002년 7월 먼저 인출됐다. 조 선대회장은 이외에 프랑스 파리 부동산을 보유한 스위스 회사 주식도 보유하고 있었다.

한진그룹 일가는 2002년 11월 조 선대회장의 사망 후 상속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 해외재산을 상속세 납부 대상으로 신고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거쳐 2018년 4월 한진그룹 일가에 가산세를 포함해 약 852억원의 상속세를 부과했다. 한진그룹 일가는 “스위스 계좌의 존재를 몰랐고 신고를 누락한 것도 재산을 은닉하려던 의도는 없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과세당국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부는 “해당 계좌는 사실상 추적이 불가능하고 극소수만이 돈을 인출할 수 있다”며 “조세 회피 목적 외에 이 계좌를 이용할 이유가 없고 사전에 인출한 금액의 행방도 확인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상속재산을 치밀하게 은닉한 것”이라고 봤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세금을 내지 않았을 때 과세당국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는 점을 근거로 조 선대회장이 사망하기 전 스위스 은행 계좌에서 빠져나간 600억원에는 상속세를 매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세법에 따르면 국세를 포탈했을 경우 국세청은 그로부터 10년 안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 다만 상속세·증여세와 관련해 금융재산을 은닉하려는 부정행위가 인정됐을 때는 과세 처분이 가능한 기간이 15년으로 연장된다. 국세청은 15년을 적용했지만 재판부는 10년이 적용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인출된 금액의 용도가 확인되지 않는 데다 원고들이 조 선대회장과 공모해 인출했다는 증거도 없다”며 “상속재산으로 추정될 뿐 과세가 가능한 법적 근거가 없다”고 했다.

박시온 기자 ushire90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