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31일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국회 로텐더홀에 들어서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피켓 시위를 펼치고 있다. 
 김범준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국회 로텐더홀에 들어서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피켓 시위를 펼치고 있다. 김범준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국회에서 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두고 윤 대통령이 180도 바뀌었다는 평가가 정치권에서 나왔다. 과거와 달리 야당 대표를 먼저 호명하는가 하면 ‘부탁’과 ‘감사’ 등 낮은 자세를 뜻하는 표현도 자주 했다. 어려운 민생 현안을 여야 협치를 통해 돌파하고자 하는 윤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시정연설 파격은 서두에서부터 시작됐다. 우선 여당 대표를 야당 대표보다 먼저 호명하는 관례를 깼다. 윤 대통령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에 이어 김진표 국회의장과 김영주·정우택 국회 부의장을 먼저 호명했다. 그다음엔 “함께해주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님, 이정미 정의당 대표님,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님”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이 대표를 언급하며 인사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야 원내대표단에 대한 호명 역시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 순이었다.

윤 대통령은 당초 연설문 초안에 있던 문재인 정부 관련 비판 문구 등도 직접 삭제했다. 초안에는 문재인 정부의 방만 재정과 카르텔 관행, 부적절한 세금 착취 등을 지적하고 현 정부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초안을 읽은 윤 대통령은 “우리가 더 잘해야 한다”며 직접 펜을 들고 이 같은 문구를 모두 덜어냈다고 한다. 실제 연설문에는 ‘문재인 정부’ 등 과거 정부를 지칭하는 표현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27분간 시정연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경제’(23회)였다. ‘국회’(10회), ‘협력’(8회), ‘협조’(5회), ‘부탁’(5회) 등 초당적 협력을 강조하는 표현도 다수 나왔다. 연설을 마무리하면서 윤 대통령은 “국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며 몸을 낮췄다.

시정연설을 마친 뒤에는 국회 의장단과 여야 원내대표, 17개 국회 상임위원장들과 간담회를 했다. 역대 대통령이 국회에서 상임위원장들과 간담회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 대통령은 간담회를 시작하며 “오늘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회의 의견 등 많은 말씀을 잘 경청하겠다”고 밝혔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등 민감한 질문에는 지출 조정 이유와 향후 확대 방침 등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간담회를 마치며 윤 대통령은 “위원장님들의 소중한 말씀을 참모들이 다 메모했을 뿐만 아니라 저도 하나도 잊지 않고 머릿속에 담아 뒀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협치 제스처에도 야당 반응은 냉담했다. 홍 원내대표는 시정연설 후 기자들과 만나 “윤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설명한 내년도 정부 예산안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예산”이라며 “매우 실망스럽고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야당 의원들은 윤 대통령의 연설 동안 단 한 차례도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일부 민주당 의원은 윤 대통령이 먼저 악수를 청하자 마지못해 앉은 채로 악수했다. 김용민 의원은 자신의 SNS에 “윤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길래 ‘이제 그만두셔야죠’라고 화답했다”고 썼다.

시정연설 중 야유나 고성은 지난 24일 여야 간 합의에 따라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윤 대통령이 국회에 도착하자 로텐더홀 계단에서 ‘민생경제 우선’ ‘국민을 두려워하라’ ‘민생이 우선이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서 ‘신사협정’을 어겼다는 지적도 나왔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